상도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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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교회 입문 2.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3. 인자하신 하느님 4.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5.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6.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성실하심
7. 사람이 되신 하느님 8. 예수님의 공생활
9.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 10. 예수님의 부활
11. 성령(聖靈) 12. 삼위일체(三位一體)
13. 가톨릭교회 14. 그리스도의 사목활동
15. 세계 교회사 16. 한국 가톨릭교회사
17.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18.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이신 마리아
19. 갈라진 신앙세계 20.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21. 인간생활과 하느님의 계획 2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
23. 가치 있는 생활 (5·6·8·9 계명) 24. 의로운 사회 건설 (4·7·10 계명)
25.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 26. 은총과 신성(神性)에의 참여
27.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 28.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29. 파스카 신비와 성사생활 30. 세례성사(洗禮聖事)
31. 견진성사(堅振聖事) 32. 성체성사(聖體聖事)
33. 성품성사(聖品聖事) 34. 고해성사(告解聖事)
35. 혼인성사(婚姻聖事) 36. 병자성사(病者聖事)
37. 그리스도인의 죽음 38. 하느님의 나라가 오심
1. 가톨릭교회 입문
1-1.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 질문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들이 던진 이 질문들로 지혜와 해답을 얻어왔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인간 생활은 많은 진보를 가져왔다. 과학의 발달이란 바로 인간의 상상력, 인간이 던진 질문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엄청난 변화와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명의 근원, 죽음의 본질, 죽음 후의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였다. 인간 실존,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수학적으로 증명되거나 과학적인 관찰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진정한 삶의 의미와 그 향방에 대해 거듭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누구이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올바른 삶이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2. 인간의 갈망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 가지 기능 즉 지능, 의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능은 진리(眞理)를 찾고, 의지는 선(善)을 위해 주어졌고, 정서는 아름다움(美)을 찾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진·선·미를 위해 존재하며, 이를 갈망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악을 피하고 선을 찾으며, 주어진 아름다운 정서를 찾는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보다 높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의미를 찾는 과정이 곧 인생이다. 인간은 모두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 고귀한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1-3.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인간의 지성과 종교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종교는 없어질 것이라는 계몽주의 이후의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종교의 역할과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음의 두 가지 공통된 특성을 지닌다.

첫째, 모든 종교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려 하며, 각각의 종교가 제시하는 해답은 다를지라도 그 질문만은 같다. 즉, 인간이란? 인생의 의미는? 선과 악 그리고 희로애락의 원인은? 인간의 참된 행복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인간과 우주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둘째, 종교는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확신을 준다. 종교는 인생문제에 과학적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나 인간의 삶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떠한 경우든 인생의 신비에 대한 해답들은 과학적인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동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과학적인 증명을 추구한다면 종교가 주는 해답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는 이성적(과학적) 이해를 초월한다.

1-4.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참된 삶과 영원한 생명은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그 해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인류에게 가장 진정한 복음(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계시(啓示)종교로서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심으로써만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2.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Q 하느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A 하느님은 대자연과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Q 하느님은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가?
A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2-1. 계시

인간에게 하느님은 신비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직접 드러내 알려 주신다.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신앙은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러한 행위를 통한 깊은 신뢰 속에서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이룩되는 진리이다. 우리가 이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인간을 도우시어 우리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시지만 그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또 그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식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다. 하느님은 신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은총을 주시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 신앙에 응답하도록 일깨우는 동시에, 기도와 신앙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갖게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움직이시면서 말씀하실 때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시며, 천지 만물을 왜 만드셨으며, 사람은 무엇이고,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당신이 스스로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에게 모든 존재의 신비를 알려주고 계신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계획을 계시하시기 전에 합당하게 준비하도록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계시를 드러내셨고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을 미리 알려 주셨다. 그런데 예언자들을 통한 당신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 구세주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준비로 이루어졌음을 성서는 일러주고 있다.

구약의 약속과 예언대로 구세주가 오심으로써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렸는데 이때를 신약시대라 한다. 이때는 하느님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자이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해서, 오늘날에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2-2. 성경

하느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성경이 목적하는 바는 인간의 구원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서 구약과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경전으로 받들고 있는 성경은 하느님의 메시지로서 그리스도교회의 모든 가르침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규범이 된다.

구약성경 46권

● 오경 & 역사서 : 21권
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기 / 판관기 / 룻기 / 사무엘기 상·하 / 열왕기 상·하 / 역대기 상·하 / 에즈라기 / 느헤미야기 / 토빗기(제 2경전) / 유딧기(제 2경전) / 에스테르기(일부 제 2경전) / 마카베오기 상·하(제 2경전)
● 시서와 지혜서 : 7권
욥기 / 시편 / 잠언 / 코헬렛 / 아가 / 지혜서(제 2경전) / 집회서(제 2경전)
● 예언서 : 18권
이사야서 / 예레미야서 / 애가 / 바룩서(제 2경전) / 에제키엘서 / 다니엘서(일부 제 2경전) / 호세아서 / 요엘서 / 아모스서 / 오바드야서/ 요나서 / 미카서 / 나훔서 / 하바쿡서 / 스바니야서 / 하까이서 / 즈카르야서 / 말라키서

신약성경 27권

● 복음서 : 4권
마태오 복음서 / 마르코 복음서 / 루카 복음서 / 요한 복음서
● 사도행전 : 1권
● 서간 : 21권
바오로 서간 열네 편 / 야고보 서간 / 베드로 서간 두 편 / 요한 서간 세 편 / 유다 서간
● 요한 묵시록 : 1권

2-3. 제 2경전이란? (9권)

위의 구약성서 가운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의 일부,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의 일부, 마카베오기 두 권을 제 2경전이라 부른다. 유다인들은 기원 후 90년 경 팔레스티나의 얌니아(Jamnia)라는 곳에서 유다교의 경전 목록을 확정하였는데, 여기에 제 2경전에 해당되는 경전들이 빠져 있으나 382년 로마의 주교회의에서는 제 2경전에 해당하는 경전을 포함하여 정경으로 확정하였다.

2-4. 성전(聖傳)

가톨릭교회는 성전(聖傳)을 기록되지 않고 교회에 전해지는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경과 똑같이 받아들인다. 성전은 성경의 바탕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역사 안에서 조상들의 입을 통하여 충실히 보존하면서 후손에게 전달했다. 신약시대에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했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성경과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을 성전은 한 몸인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낱낱이 기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성전은 성경이 담고 있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서 교회를 통해 계시로서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3. 인자하신 하느님
Q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A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해방자이며 위로자로서 모든 선의 근원이십니다.

지난 세월 많은 이들은 하느님의 엄한 면, 전지전능한 면, 심판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였고 이로써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하느님의 심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대하기 두려운 분으로 알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펼치면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면모들 대신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크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이들, 창녀들, 죄인들과 어울리시면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하느님에 대한 주요한 계시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카 11,15-32)에 나온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이 계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 안에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하는 그러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고, 고통 받고 억눌리며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쓰는 마음 모두를 뜻한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느님은 강력한 의지와 위대한 자비로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생활의 계명을 주셨으며 그들의 원수를 쳐 이기시고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유지하시고 지배하신다.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을 다 알고 계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슬픔을 알고 계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계신다(탈출 3,19-22).

하느님은 무한히 성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범할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본질상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어 가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계신다. 그 영원에서 볼 때 모든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돌보신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충만한 생명과 완전한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사 5,24)으로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이 거룩함은 자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죄인들을 낫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신다(이사 6,5-7).

4.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Q 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A 하느님께서 ‘한처음’에(무, 없음으로부터) 하늘과 땅(세상, 존재)을 창조하셨습니다.

4-1. 무(無)로부터의 창조
v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의 창조주로 계시하신다. 하느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주시는 축복을 통해서 당신의 완전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천사들과 지상 사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영(靈)과 육(肉)으로 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무’로부터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말은, 만물이 자기의 본질에 따라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는 땅도 없었고 우주도 없었으며 재료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계시다. 사물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실재를 받았다.

창세기의 서두에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고 하는데,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볼 수 없는 것, 모든 것까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다는 말이다. 창조란 아무런 재료가 없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전에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있었다면 오직 무한하신 하느님 한 분뿐이었다. 이 세상 만물이 어떤 꼴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창조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이란 단순히 입에서 뱉어지는 말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던 그 무엇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조되는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의지 행위에 의해서 세상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하느님의 의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세상을 창조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4-2. 창세기의 창조설화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에서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의 이야기를 서술한 저자는(창세 1,1-2,4)창조사업을 ‘육 일’ 간에 걸친 사업으로 묘사했고, 일곱째 날에는 “하느님이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3)라고 기록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주간’에 걸쳐 하느님이 창조사업을 완성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늘 ‘현재’이시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와 세계관과 종교관을 이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 진리는, 하느님께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주라는 계시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바탕과 또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바탕을 제시한다.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또 영원한 의미를 갖는 계획에 인간을 참여케 하셨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맞아들이는 인간은 피조물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된다.

4-3. 천사

천사는 무엇인가?
천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을 섬기면서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하느님의 사신(使臣)이다.

성경은 천사들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순수한 영적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천사들은 구약과 신약의 구세사(救世史)에서 가끔 임무를 수행했다. 천사들의 수는 분명히 많지만 그 중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 세 천사의 이름이 성경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그들의 보살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마태 18,10; 26,53),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고 성경은 말한다.

하느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은밀한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사들의 축일을 지내고 또 매일 미사성제 때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한다.

5.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Q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은 무엇인가?
A 영혼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사람의 생명과 정신활동의 근원이 되며 죽지 않는 것이다.

Q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A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성(知性)과 자유, 의지를 주시는 외에도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만들었음을 뜻한다.

5-1. 하느님 모상(模像)으로서의 인간

첫째,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겉모습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닮았다는 의미이다. 즉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과 선악을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양심,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점에서 진선미(眞善美)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피조물보다도 그 안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안에는 물질적 실재와 영적 실재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으나, 그 육체와 영혼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는 아니다. 육체와 영혼은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룬다. 영혼은 육체가 인간의 몸이 되게 하는 살아있는 원리이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 각 사람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신다.

5-2. 남자와 여자로 창조됨

둘째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다. 하와의 특별한 창조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로 창조된 것임을 말한다. 즉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진리를 극적으로 담고 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을 강조한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적 조건의 고독을 덜어 주면서 서로를 완성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창세기의 관점이다(창세 2,23-24).

5-3.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

셋째로,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고’ 또 세상을 ‘보존하기’ 위해(창세 1,26-28) 창조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다스릴 영광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아름다운 예술과 상상력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 높여 준다. 노동은 인간이 지닌 사명의 일부이며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술이 인간에게 주는 봉사와 풍요한 생활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다. 창조적 작업은 인간의 영광이요 또 인간의 작업은 가능한 한 인간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6.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성실하심
Q 원죄란 무엇인가?
A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은 것을 말하며, 이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졌던 우정의 계약이 파기되고, 첫 인간이 누렸던 특별한 은총,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고 죽음의 권세에 예속되게 되었다. 이 원죄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자녀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Q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 슬픔이 원죄의 결과인가?
A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들이 행한 행위 때문에 고통, 불행을 당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산과 들을 오염시키는 결과로 오염된 물을 마시게 되고 이로써 질병을 얻게도 된다. 여기에 인간의 행동에 대해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이유가 있다.

Q 인간의 타락(원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인가?
A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온전히 주셨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엄격하심을 말해 준다.

Q 악마(사탄)는 누구인가?
A 하느님이 본래 선하게 창조하였으나 후에 자신들의 의지로 타락한 악한 영들로서,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악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Q 원죄 이후 하느님은 인간을 버리셨는가?
A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계약에 충실하시어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이 당신께 돌아오도록 초대하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도록 허락하셨다.

6-1. 고통과 악의 문제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시고 또 인간에게 끊임없는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며, 어떠한 악도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고통과 비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악의 문제는 신비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하느님은 악이 있기를 원치 않으시나 악이 있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오게 될 때, 하느님은 이 불행도 선한 방향으로 돌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악의 문제는 우리가 생생하게 체험하는 살아 있는 문제다.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해명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신비, 곧 예수의 생애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 덜어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느님의 아들은 불행을 쳐 이기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셨다.

6-2. 악의 기원 (원죄의 문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대항한 인간의 첫 반항의 사실을 상징적인 말로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성경은 그 죄악을 주로 교만과 불순종이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하느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다. 즉 하느님과 맺은 우정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즉 전 인류에게 미쳤다. 이렇게 첫 인간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범한 죄를 원죄라고 한다. 각 사람이 물려받는 원죄는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는 다르다. 인간 본성은 타락하고 받았던 은총을 상실하고 본성적 힘도 손상되어 죽음의 권세에 예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본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났다. 원죄가 전달된다는 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성화은총(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은총)이 없이 그리고 성화 은총을 수반하는 특별한 은혜도 없이 창조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당하는 많은 슬픔은 결코 원죄의 결과만은 아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가혹하고 견딜 수 없는 불행은 거의 다 인간의 계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결과다. 인간의 죄는 미리 정해진 것도 아니므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남용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타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깨우쳐주는 것은 책임의 의미, 죄의 중대성 그리고 하느님의 길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자유와 충분한 통찰력을 주셨다.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는 하느님이 강하시고 정의로우시며 또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엄격하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6-3. 악마

타락한 인간이 있듯이 타락한 영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성경은 사탄을 유혹의 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창세 3,1-5). 사탄은 배신자요 교활한 유혹자이다. 사탄은 감각과 상상과 강한 욕망, 공상적 이론, 혹은 인간 거래의 무질서한 접촉을 통하여 우리 안에 탈선을 가져오려고 하는 자이다.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다. 악마가 어떠한 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제재를 받는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로마 8,28). 사탄과 그 밖의 타락한 영들은 단순한 피조물들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악해지거나 악의 근원이 되라고 만들지는 않으셨다. 악마와 기타의 악령들은 하느님이 본래 선하게 만드셨으나 그들 스스로 악하게 되었다.

6-4. 성실하신 하느님

첫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그 후손들은 죄 중에 그를 뒤따랐으나 하느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시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하느님은 구세사를 통하여 인간을 참회와 쇄신, 구원에로 거듭거듭 부르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셨다. 이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변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구약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구약 전체의 모든 약속과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7. 사람이 되신 하느님
Q 하느님이 보내 주신 구세주는 어떤 분이신가?
A 하느님이 보내 주신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Q 예수 그리스도란 무슨 뜻인가?
A 예수는 구세주란 뜻이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 즉 거룩한 기름으로 축성된 왕, 대사제, 예언자란 뜻이다.

Q 예수는 누구인가?
A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으로 남아 계신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다 갖고 계시며, 죄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신 분으로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붙이시고 부활하신 우리 구세주이시다.

Q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성자)을 보내신 첫째 목적은 무엇인가?
A 성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끄는 데 있다.

7-1. 예수님이 사시던 땅
예수님의 조상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왔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여 유배생활을 반세기 동안이나 하였다. 기원전 539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팔레스티나 땅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에 의해 재차 침략을 당하여 그 속국이 되었다가 연이어 이집트와 시리아의 속국의 신세로, 마침내 기원전 64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4년에는 로마가 대(大) 헤로데 왕의 아들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네 등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시던 시대의 유다 지방은 기원 후 26년부터 36년까지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7-2. 예수님의 탄생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비천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구세주에 대한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이 메시아(구세주)가 자기들을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위대한 다윗의 후손이며, 따라서 그의 출생은 특별한 징조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때가 되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주셨다(루카 1,30-33). 그러나 그리스도(구세주)는 일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다. 호구조사(戶口調査)를 위해 베들레헴에 갔던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6-7) 예수님의 비천한 출생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비참함에 처음부터 동참하심을 암시한다.

7-3. 성령에 의한 탄생

성경은 요셉이라는 나자렛 사람과 약혼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잉태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1,18-23절과 루카 복음 1,26-45; 2,1-20절을 통해 예수의 탄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성령에 의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알아듣기 힘든 하나의 신비로서 인간 이성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7-4. 참 인간이신 예수

예수님이 영에 의해 출생했다고 해서 그는 우리와는 다른 인간, 영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인간의 정신, 인간의 의지, 인간의 감정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시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약함, 목마름(요한 4,7)과 배고픔(요한 4,32)을 겪으셨고, 슬퍼함(요한 11,33), 불쌍히 여김(마태 15,32), 노여움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에서 그분의 인간성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그분은 정신과 육체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인간 본성이 가장 고귀하게 되고 또 그분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모범이기 때문이다(마태 11,29). 당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7-5. 하느님이신 예수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시면서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복음서에서 이미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명백히 불리고 있다.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 보이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이시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또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느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의 지혜가 예수님 안에 있었다. 예수님은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이행하실 것이다. 이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에 모일 것이고, 사람의 아들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태 25,31-46).

7-6. 하느님의 아들, 성자(聖子) 예수

예수님은 창조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분과 당신과의 관계를 계시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셨다. 그러나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의 본성은 같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는 영원한 사랑과 예지와 힘을 함께 지니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 주신다.

7-7. 인간 예수

예수님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때가 되어 인간 본성을 취하셨으며, 영원히 인간으로 존속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완전한 일치와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 동정 마리아 몸에서 인간 본성을 받으시었고, 그 인간 본성을 하느님의 아들의 위격(位格)과 일치시키셨다. 바로 이것을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한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로 변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로 존속하시는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지만, 신성은 조금도 잃지 않으신 채로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취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위격은 하나이고, 그 위격은 인격이 아니라 신격(神格)이며, 성삼위의 한 위(位)이시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그래서 그분의 행위는 신적 자유의 행위이며 인간적 자유의 행위였다. 그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의해서 위축되거나 말살되지 않았다.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가장 거룩한 수난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의화(義化: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의 공로를 세우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강생의 신비 전체 즉,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 신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게 하셨다. 창조의 목적 전체가 피조물을 성삼위(聖三位)와의 친교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8. 예수님의 공생활
Q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A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 특히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타났다.

Q 예수님은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는가?
A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특히 하느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파견되셨다.

Q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A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비와 신앙에로 이끌기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Q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주제는 무엇인가?
A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과 성부의 자비와 관대하심,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8-1. 예수님의 사명

현세적인 메시아를 열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오셨고, 인간에게 복음(福音)을 선포하시러 오셨던 것이다.

8-2. 예수님의 공생활(公生活)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막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40일간 밤낮으로 단식하셨다(마태 4,1-11). 그 무렵에 예수님은 대략 30세이셨다(루카 3,23).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들은 후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시작하자 추종자들이 따랐고,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며, 설교하는 곳마다 함께 여행하였다(마태 4,18-22).

예수님도 당신의 기쁜 소식 즉 복음을 듣고자 하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마태 4,25), 때로는 사오천 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인기에 대한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호기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였다.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염탐하고, 혹은 공개토론에서 그분에게 도전하다가 결국은 그분을 살해하기 위해 음모까지 꾸몄다.

8-3. 기적의 의미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시던 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동네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후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요한 2,1-11).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근하려는 더욱 강한 소망을 일으킨 것은 그분이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치유의 소문을 들은 병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희망으로 삼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기를 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기적은 인간의 절박한 구조와 요청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표징과 이적’에 대한 흥미만을 갖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요한 4,48).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신앙에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출발하도록 요청한다. 새롭게 된 인간들은 이 고뇌와 모순에 찬 세계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그것에 대항해 갈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이다.

8-4. 하느님 나라

예수님은 모든 중요한 주제를 거의 비유(比喩)와 예를 통해서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설교뿐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산상설교(山上說敎, 마태오 복음 5장-7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느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가르치신 것을 모든 삶과 사회의 가치의 기준으로 받들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 세계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후에 다가올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준비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하느님의 창조사업 협력자로서 역할을 다할 때, 하느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 세우는 것이다.

8-5. 예수님의 삶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력을 느낀 이유는 그분의 행적 즉 생활 자체였다. 예수님이 제안하신 것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기회 등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작은 씨앗과 같이 하찮게 보이는 그 나라가 크게 자라게 된다. 그 나라는 세상의 권력과 같이 강제적인 폭력이나 억압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로써 다스려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

9.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
Q 예수님은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가?
A 우리를 사랑하고 구속하고자 하심이니,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당신 가르침과 모범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Q 예수님은 왜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으셨는가?
A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명하시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Q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이 어찌하여 제사가 되는가?
A 예수님이 대사제로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바쳤으며, 이로써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Q 예수님을 유일한 중재자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A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간을 소외와 비참에서 구원하여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하셨으며, 이러한 중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9-1.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수난을 당하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분 친히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다.

우리 주님의 수난은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의도는 가장 완전하고 적절하게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항했기에 그 보상을 완전히 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9-2. 구속자이시자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보내어진 예수님은 완전한 구속자였다. 하느님의 참 아들이며, 인간이기도 한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적절한 속죄행위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재자이시다.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분이 인간을 소외와 비참에서 구제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셨다. 수난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잘 드러낸 완전한 구속방법이었다.

초대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설교할 때에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빛나는 무한한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통은, 그분이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더욱 혹독한 것이었다.

9-3. 예수의 반대자들

예수님께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의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 그 당시 사회, 종교, 정치적으로 기득권(旣得權)을 가지고 있었던 지도층의 사람들, 즉 유다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유다교의 최고 의결기구)과 로마 통치자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그분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위험스러운 것, 당시 사회 구조를 흔드는 불순한 것, 자기네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본뜻이 무엇인지를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반대와 박해를 무릅쓰고 계속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셨다. 그분은 비단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만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부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도 기꺼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셨다. 이는 그분의 구원 소식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며, 당신은 모든 백성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9-4.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

복음서에서 수난은 최후만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임박했던 당신 수난의 의미를 명백히 설명하셨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부활 후까지 그 뜻(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4,25).

이 최후만찬은 당신이 곧 바치실 십자가의 제사를 미리 앞당겨 상징적으로 하느님께 바친 제사이다. 여기서 그분은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이 성사를 집행할 사제직도 세우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으심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을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말씀하셨다(마태 26,26-28).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고, 곧 닥칠 고통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셨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대사제와 헤로데, 빌라도 앞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으셨다. 이 재판을 받으시면서 그분은 심한 모욕을 당하셨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잡아떼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고독과 처량함을 느껴야 했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한량없이 슬퍼하시는 것을 보시는 괴로움까지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 구원의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인내와 위대한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비애를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더욱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9-5. 수난과 죽음의 의미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의 결과는 영원하다. 그분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모든 결과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영생에로 인도하는 은총과 은혜를 모두 받게 되었다. 죄가 인간 위에 군림하였고(로마 5,21), 인간을 노예화 하였다(로마 6,7). 그러나 이제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으며(콜로 1,13-14) 사탄도 정복되었다.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은 옛 법의 구속력을 끝냈다. 그 법은 거룩한 것이긴 하였으나 생명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 법은 죄를 피할 의무를 가르치면서도, 그렇게 할 힘을 주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로마 7,7-25). 육체의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으로써 정복되었다(1코린 15,54-57). 모든 죽음은 비극적 불행이 아니라 사랑의 절정이요, 새 생명의 입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준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은 전 인류의 고통, 우리 매일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트게 된다.

9-6. 대사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대사제이시다(히브 4,14). 그분은 공생활 중에 가르치시고, 죄를 사하시고, 성화하는 사제의 활동을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완전한 제사를 봉헌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셨으며, 이전의 계약과 사제직을 폐지하셨다(히브 9,1-10).

그리스도의 수난은 화해의 활동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인간의 죄를 위해 속죄하셨으므로, 죄로 말미암아 조성되었던 온갖 분열과 적개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죄는 인간 소외의 가장 깊은 뿌리이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갈라놓기 때문이다(에페 2,13). 죄는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적의를 조성하고, 개개인 안에 내적인 쓸쓸함과 비합리적인 생각을 야기하며(로마 7,23-24), 전 우주와 죄인의 관계도 어색하게 하므로, 죄인은 세상 안에서 이방인이 된다(창세 3,17-19).

9-7. 그리스도를 따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우리는 이 지상 생활 가운데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 신자답게 산다는 것을 뜻한다.

10. 예수님의 부활
Q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은 무엇인가?
A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당신의 전능으로 영혼과 육신이 결합하여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활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한다.

Q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A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드러내고,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

Q 부활 후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A 부활 후 40일 동안 가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의 임무를 맡기시면서 교회 창립을 완성하셨다.

Q 승천의 신비는 무엇인가?
A 부활 후 제 40일째 되는 날에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시니, 이로써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에 참여하며,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활동은 중지하나 우리 주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Q 그리스도는 승천 후 어떤 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가?
A 성령을 통해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 즉, 믿음과 기도생활 을 하는 교회 안에, 성찬례와 성사의 집행 중에, 당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

10-1. 부활하신 그리스도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라는 제자들의 고백처럼 부활사건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돌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미리 말씀하신 대로(마태 16,21) 안식일 다음 날, 즉 주일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이 부활은 신앙생활의 중추가 된다.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역사적 사건이며, 그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당신 제자들에게 치명적 타격이 되었다. 제자들은 파스카 사건을 두고 미리 하신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했으며,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에게 걸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먼저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져왔을 때도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루카 24,11).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몸소 나타나시자 그들은 허깨비를 보는 것이려니 하였다(루카 24,37). 사도 토마스는 부활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고충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른 사도들의 증언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자기 눈으로 뵙고 그분의 못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들한테 나타난 그분이 과연 돌아가신 그분인가를 확인하지 않는 한 믿지 못하겠노라 하였다.

많은 이들이 예수의 빈 무덤, 사도들의 증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도들의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부활 사건을 여러 방법으로 그럴 듯하게 설명해 보려는 인물들이 언제나 있었다.

부활 신앙이 계속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증인들은 믿음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분의 권능이 그들과 그들의 말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성 바울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보았던 인물을 많이 열거하고 있다(1코린 15,3-8). 바오로가 코린토 1서를 쓴 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30년도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바울로가 이 글을 쓰면서 언급하는 인물들은 대다수가 아직도 살아 있었으므로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본인들이 직접 다짐할 수 있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해 온’ 신조(信條)가 아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직후부터 놀랍고도 진지한 신앙과 활약이 일어났던 것이다.

10-2. 부활의 뜻

부활하신 사실은 근본적으로 중대하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단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1코린 15,14.17-18)

사도시대의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데 대한 성부의 답변이요, 죽기까지 순종한 종에게 내리시는 보상이라고 생각하였다(필리 2,7-8). 이리하여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특권을 얻으신 분으로 등장하신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을 성부께서 승인하시고 인준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변화했다. 그분은 여전히 같은 예수님이요, 여전히 우리의 형제이시요, 우리와 같은 살을 나누고 계시지만 지금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1코린 15,45)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과는 다른 육체를 지니신 것이다(요한 11,38-44). 부활한 육체가 참 육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완성의 처지에 있던 육체와는 다르며 그것을 초월해 계신다(1코린 15,42-54).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인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 ‘부패하지 않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1코린 15,20)이 되신 그분의 부활은 인간 변혁의 원형이시자 이 변혁의 시작이다.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10-3. 승천(昇天)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지상에서 여러 번 발현하시고,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사도 1,2),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승천의 신비는 두 개의 다른 측면을 갖는다. 첫째는 예수님의 수고와 수난이 환히 드러나 영광에 드시는 일이었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게 수행해 오신 당신의 봉사 직무를 종결지으신 시각을 말해준다. 루카는 부활과 승천 사이에는 40일의 기간이 있었다고 전했다(사도 1,3).

승천은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는 사건이다. 승천하여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서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게 된 것이다. 영광을 입으신 생명에 드심으로써 그분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계시게 된 것이다.

10-4.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존을 일시 거두셨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선물을 내려주시기 위함이었고(요한 16,7), 당신은 항상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이다(마태 28,20). 신앙과 기도로 영위되는 교회의 생활에 그분은 현존하시며, 영광을 입으신 그분의 몸과 성사를 통한 만남에서 특히 함께 계신다. 우리의 사랑에 찬 생활에도 현존하신다.

11. 성령(聖靈)
Q 성령은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A 성령은 교회 안에 항상 머무르시어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도록 지도하시며, 신자 각자가 교회에 봉사하도록 적합한 은사(恩賜)를 주신다.

Q 특은(카리스마)이란 무엇인가?
A 특은이란 성령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각별한 호의로 내려 주시는 예언, 영의 식별, 기적과 같은 몇몇 은혜를 말하며, 이러한 특은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자라도록 하는 데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사랑이시며 복되신 성삼위(聖三位) 가운데 다른 위(位)들과 구분되는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똑같이 참 하느님이시다. 또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대변자이시다. 영원하신 성부와 예수께 보냄을 받으셔서, 하느님과 우리가 우정을 맺도록 하시며(2코린 1,22),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불어넣어 하나가 되도록 한다(로마 5,5). 이렇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시고 같으시다.

11-1. 성령의 역할

성령은 교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몸의 ‘영혼’이시다. 교회 생명의 원천은 성령으로서, 성령은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나 성사를 통해서 그 성사 특유의 은총을 받은 모든 이 안에서 활동하신다.

성령이 항구히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에페 2,18).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0-11).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1코린 3,16; 6,19),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갈라 4,6).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며, 당신 활동의 결실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에페 4,11-12).

11-2. 성령의 선물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이 특정한 의미로 쓰일 때는 은총의 생명이 성장하도록 이끄는 특별한 은혜들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성령의 이 은혜들을 슬기, 깨달음, 의견, 굳셈, 지식, 효경,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사 11,2-3)이라고 한다.

‘특은’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각별한 호의에서 내려주시는 몇몇 은혜를 뜻한다. 예언, 영의 식별, 기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특은들은 이것을 받는 당사자에게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4,12) 데에 뜻이 있다.

12. 삼위일체(三位一體)
12-1. 신앙의 신비로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같은 신성(神性)을 가지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位)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이 여럿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시다는 것을 ‘삼위일체’라 부른다. 그 세 위의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은총을 통해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났다(루카 3,22).

12-2. 구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구약성경에도 하느님께는 구별되는 위격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듯한 구절을 볼 수 있다. 교부(敎父)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 등이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풀이하였다.

12-3. 신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최후의 만찬 자리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극진한 애정을 나타내시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성자이신 당신은 성부께 보냄을 받으신 분이며, 당신이 올라가시는 대신 성부께 청을 드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17.29-35; 2코린 13,13; 1코린 12,4-6)라고 하시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13. 가톨릭교회
Q 예수님은 왜 교회를 세우셨는가?
A 예수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교회를 세우셨다.

13-1.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설립하셨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봉사직과 진리를 전하게 하시었다. 교회라는 제도가 존속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하였고,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언약하셨기 때문인 것이다(마태 28,20).

가톨릭의 신앙을 받아들임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할 때에, 사제를 통해서 성사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줄 때에,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신앙에로 부르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회의 권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목활동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외형적인 교회와 안 보이는 영성적인 교회, 둘이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보이는 교회 안에서 또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행동하신다.

13-2.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Q 하느님은 어떻게 당신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가?

A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고 완전한 계약을 이루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새로운 백성으로 부르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9~17)이라고 한다. 이 말은, 교회란 성직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모든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 모두가 교회이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요한 3,5-6) 드디어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교회헌장 9).

13-3.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백성’이 교회가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한데 뭉쳤기 때문이다. 모임을 만드시는 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이들, 억압받은 이들,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투신(投身)해야 할 것이다.

13-4.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교회

교회가 제도화되고 거대화되면서 돈 많은 이들, 권력 있는 이들, 학식 있는 이들이 교회의 주된 구성원이 되는 경향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더욱 구체화되어,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감싸기를 그만 둔다면, 이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더욱 더 대형화되고, 성직자, 수도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이 호화롭게 된다면,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도시빈민, 실업자, 외로운 노인, 떠돌아다니는 사람, 노동자, 농어민을 내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 교회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13-5. 교회와 하느님 나라

교회와 하느님 나라는 엄밀하게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실현되는 모습이며, 그 나라의 최종적 완성은 영원한 세계에서 보게 된다(교회헌장 5). 하느님의 통치가 그러하듯이 그분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며,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성을 볼 것이다.

세상이 비참한 생활과 착취와 전쟁과 사회분열과 인간차별과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약속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교회는 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누룩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 사이의 친교를 막는 온갖 벽들을 허물면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지는 세상을 건설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금방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약간의 누룩이 전체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듯이 교회 또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새 누룩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교회 구성원 각자는 사회, 정치, 경제 문제에 각자 자기의 처지에 따라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13-6.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신부(新婦)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교회는 충실한 배필로서 항상 진리를 가르치고, 거룩함과 구원의 원천에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자모이신 성교회’라는 표현은 교회 초창기부터 사용되던 문구이다.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까닭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무수한 자녀들을 낳기 때문이다(교회헌장 12). 모든 신자가 교회에게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시켜 우리 생명을 양육하시는 만큼 우리는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와 교사’로 받드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끊지 못할 인연으로 결합된 충실한 신부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고 계심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다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다.

13-7.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Q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결합되는가?
A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이 몸 안에서 서로 결합된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신비체)’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다(교회헌장 7). 사도 바오로는 여러 편지에서 신비체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몸에는 눈과 귀 그리고 손발이 각기 다른 구실을 하듯이 우리도 교회 안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어떤 이는 사도가 되고, 어떤 이는 가르치고, 어떤 이는 관리하며, 다른 이들은 보다 낮은 직능을 맡는다(1코린 12,28-31).

그리스도께서 이 몸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을 말하며,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아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더 깊이 스며듦을 말한다.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다면 교회를 더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13-8. 교회의 특징

Q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A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이다.

초세기의 여러 신앙 고백문에는 가톨릭교회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한다. 이 특성들은 교회의 본질이다.

(1) 하나인 교회
교회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자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에 있어서 하나이다. 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단일한 예식을 갖고 있다. 모든 이가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단일한 구원의 희생제사에 함께 모이며,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 일치시키는 한 덩어리 빵을 나누어 먹는다. 전 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교회의 여러 부분들 간의 친교(親交)에서도 하나 됨이 드러난다(요한 17,20-23).

(2) 거룩한 교회
교회는 거룩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으로부터 모든 거룩함이 흘러나온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가 성스러운 것은 그분 때문이다. 교회의 예배도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가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는 성사들은 그 백성이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만든다. 교회는 거룩한 생활에로 만인을 초대한다(교회헌장 39-42). 충실히 가톨릭 신앙생활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 주신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백성들이 인간의 나약성과 불완전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에 그런 불완전성과 죄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거룩하시기에 교회 자체는 거룩하다.

(3) 보편된 교회
교회는 보편되다(=가톨릭). 가톨릭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사는 만인을 위한 교회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빠짐없이 가르쳐 왔다는 점에서도 교회는 보편적이다.

(4)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사도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것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서 다스려져 온 까닭이다. 또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똑같은 교리와 생활의 길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한다.

13-9. 교계제도

Q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직무는 무엇인가?
A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직무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주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계제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교계제도를 두기로 하신 것은 당신이 위임하신 주교들과 사목자들을 통해서 백성들을 다스리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모두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영생에로 불리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소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 조직적인 교계제도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를 지도하는 봉사직이다.

(1) 교황권
교황과 주교와 사도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돌보시는 것이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사도 베드로의 직분을 계승해온 후계자들이 있다는 것과 로마 주교가 세계 교회 위에 베드로의 수위권을 계승한다는 것을 장엄하게 교리로 선언하였다.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해 관할권을 갖는다. 그는 로마의 주교일 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의 주교이다. 하느님 백성은 누구나 이 으뜸가는 목자의 사목적 지도에 따라야 한다. 교황의 권위와 의무는 신앙의 가르침과 윤리 도덕의 교리는 물론이려니와,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련된 일에도 미친다.

(2) 주교단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셨지만 단독으로 교회를 사목하는 것이 아니고, 동료 사도들과의 일치 속에 사목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 사도들의 임무를 주교들이 계승한다. 그와 같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은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들과의 일치 속에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의 순수성과 단일성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주교들이 함께 모여 공의회를 소집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전 교회의 방향을 결정해 왔다.

14. 그리스도의 사목활동
14-1.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통해 가르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 백성의 교사이시다. 공생활은 가르치는 일로 다 보내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파견하신 사람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신다(루카 10,1; 마태 28,20). 따라서 당신이 보내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단지 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저버리는 것이며,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곧 당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루카 10,16).

예수님이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몸소 증명해 보이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신성(神性)을 알게 되고, 인간의 한정된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을 설교하는 임무를 사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을 감도하시어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한 말이 되도록 하셨다. 또 만민을 당신 제자로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사도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태 28,20).

14-2. 교회를 통해 가르치시다

교회가 전달하는 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신앙을 가르치고 또 믿는다. 시대가 흐를수록 교회는 기도와 연구 그리고 성령의 보우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기에 이른다. 교리가 발전한다고 해서 어느 교리가 폐기되거나 옛 교리를 새 교리로 대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한때 교회가 강력하게 내세우던 것을 후일에 부인한다는 뜻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단 선언한 거룩한 교의의 뜻도 항상 그대로 고수되면서 여태까지 믿어온 것을 그대로 믿는다.

14-3. 믿음의 교사들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가르치셨다. 가톨릭교회는 교황과 주교들이 사도들을 계승한 신앙의 공식 교사들이요 신앙의 증인들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교회를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증인들이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교황과 주교단의 가르침에는 하느님께서 그르치지 않는 진리의 은사를 내리셨다(교회헌장 25). 사제들은 주교의 공식 파견을 받은 인물로서 복음을 설교한다. 신학자들과 다른 학자들도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의 깊은 뜻을 통찰하도록 교회를 돕는다. 사제들은 주교를 돕는 매우 중요한 협조자들이다.

신앙의 또 다른 교사들은 부모이며, 그들이야말로 “자녀의 첫째이며 주되는 교육자로 인정되어야 한다.”(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 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부모를 집안의 주교로 비유한 바 있다. 학교와 교리교육 기관에서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매우 중요한 교사들이다.

14-4. 교회의 가르침과 그 무류성

Q 교회의 무류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A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것을 판정할 때마다, 예수 친히 허락하신 대로 성령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그르칠 수 없으니 곧, 교황이 교좌(敎座)에서 선언할 때와 주교들이 공의회에서 교황과 한 가지로 판정할 때 그러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진리를 온전히 알아듣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한 16,13). 그리고 ‘믿는 교회’나 ‘가르치는 교회’는 계시된 진리를 믿거나 가르치는 데 있어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계시의 ‘위탁물’ 전체를 어느 것이든지 그르침 없이 가르칠 수 있다.

14-5. 통상교도권과 특수교도권

주교들은 복음을 설교하고, 자기 관할에 속하는 신자들의 교리교수를 감독하며, 기도와 신앙을 실천하여 생활하도록 하며, 예배 양식을 감독하며, 훈령과 사목교서를 통해서 신자들의 구원을 얻기 위해 믿고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도한다. 이러한 일들이 주교들의 ‘통상 교도권’이다.

교회의 ‘특수 교도권’은 두 가지로 행사되는데, 이것 역시 그르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공의회에서 행사된다. ‘전체 공의회’라고도 하는 이 회의에서 전 주교단이 교황과 함께, 전체교회의 신앙에 관한 것을 결정내릴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교황이 ‘교좌’에서 교리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14-6. 공의회

사도시대 이래로 큰 이단과 불화가 일어날 때마다 주교들은 공의회를 가졌다.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교사들이 일치하여 계시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니는, 오류 없는 확실성을 갖는다.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이 모두 오류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은 아니다. 공의회의 어떤 결정은 규율에 해당한다. 그러나 같은 진리가 보다 적합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교회 교도권이 작성한 교리의 공식 문항은 계시진리를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14-7. 교황권

(1) 교황의 수위권
로마 가톨릭교회는 로마주교(교황)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지역별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의 교회는 주교(主敎)가 다스리며, 사제들은 주교의 보조자로서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성당에서 주교의 대리자로서 일한다. 각 지역의 책임자인 모든 주교는 서로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세계 교회의 일에 있어 서로 협조한다. 세계에는 수많은 주교들이 있으나 이 가운데 로마주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2)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無謬性)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전 세계 교회에 교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의 최고 목자의 자격으로 단독적으로도 교도권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교좌(敎座)선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황의 단독 선언이 오류가 없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들이 채워져야 한다.
①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공식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교황도 개인자격으로나 로마 교구장의 자격으로 선언한 것은 무류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② 어떤 진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의사를 밝혀야 한다. 따라서 교황의 통상적인 설교, 지도, 권유, 해설, 경고, 반박 등이 다 무류하지는 않다.
③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 국한한다. 따라서 교황이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할지라도 과학, 예술, 인문,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주장이라면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4-8.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태도

가톨릭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과, 그 안에서 가르치시며 신비를 알려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교회의 법과 교황과 주교들의 합법적인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해 교회에 부여하신 권한(마태 16,19; 18,18)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 법과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각국의 주교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특수한 의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항목을 열거하여 ‘교회법규’를 내놓는다. 교회법규라고 하면 주일과 의무적 축일에 미사에 참례할 것, 교회의 유지비를 부담할 것, 정한 날에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것,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할 것이며, 교회가 정한 혼인법을 준수할 것 등이다.

15. 세계 교회사
15-1.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다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15-2. 종교 자유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밖의 교리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15-3. 로마교회(서방교회)의 발전

5세기 중반기는 로마의 국경지대에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 열의를 잃지 않고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켰으니,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15-4. 중세 전기의 교회(750∼1054년)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聖畫像) 파괴 논쟁
동방교회들 안에서 5∼7세기에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성화상 공경이 신도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이 100여 년 동안(726∼843년)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서 교회박해, 폭력사태, 정치적 혼란 등 사회소요가 야기되었다. 성화상 공경을 찬성하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이를 금지하는 동방교회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끝났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교회의 영향력 행사를 둘러싸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1054년 서로를 파문하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후 동·서방 교회는 1965년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기까지 결별상태에 있게 되었다.

15-5. 중세 후기 교회(1054∼1300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 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5-6.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幽囚)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 보급의 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15-7.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15-8. 가톨릭교회의 쇄신

가톨릭교회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교회는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톨릭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에서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는 이단 운동인 얀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도 가톨릭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15-9. 근대교회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반가톨릭 국가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 즉 교황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가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9년에서 1870년까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신앙과 계시의 속성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1878∼1903년)는 1891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회칙을 반포하여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회칙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15-10. 현대교회(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의 중요한 사건은 교황 요한23세(1958∼1963년 재위)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년)가 마무리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또한 타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세계를 향한 일치와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6. 한국 가톨릭교회사
16-1.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에 가톨릭교회가 탄생한 18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양반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새로운 사회질서를 찾던 변혁기였다. 당시에도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유교적 전통의 성리학이었다. 그러던 중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문물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 완고한 현실의 타파를 위한 새로운 사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이러한 문명의 흐름을 타고 서구의 그리스도교 사상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진 외교사절단(동지사 일행)을 통하여 󰡔천주실의󰡕, 󰡔칠극󰡕 등의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들어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문적 관심으로 연구되었던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은 권철신, 권일신,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이 모인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講學)회’를 통해 어느덧 신앙적 수행(修行)과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벽은 마침내 학문적 관심을 넘어서는 서학(천주교)에 대한 신앙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게 되었다.

16-2. 한국 가톨릭교회의 창립(1784년)

1784년 초봄에 북경에 파견되었다가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은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져왔다. 그는 이벽(세례자 요한)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마침내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 최초의 신자들은 서울의 수표교에 마련된 이벽의 집에서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가졌고 역사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교회 탄생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세계교회사에서 유일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서적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연구하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으며, 서로에게 세례를 주어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의 노력은 계속되어 성직자 영입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활동을 펼쳐 결국 선교사들을 모셔왔으며, 여러 핍박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이 땅의 교회를 지키고 성장시켰다.

16-3. 박해의 시대
1784년 수표교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한국가톨릭교회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韓佛守護條約)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기까지의 100여 년 동안의 혹독한 박해기를 견뎌내면서 이를 오히려 가장 튼튼한 주춧돌을 놓는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단련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을사년(1785) 봄, 명례방(현재의 서울 명동)에서 종교집회를 열고 있던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관헌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사건). 이때, 집주인인 김범우(토마스)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고 유배를 갔고 결국 한국가톨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살랐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하였다(신해박해). 이 박해 이후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고,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함으로써 1795년에는 윤유일(바오로) 등이 순교하였다(을묘박해).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는데, 이때 주문모 신부와 ‘백서’사건의 황사영(알렉시오) 등 제 1세대 신자들이 순교했다. 하지만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자들은 다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31년에는 조선에 교구(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이에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은 정하상(바오로) 등 제 2세대 지도자급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고,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안드레아)과 현석문(가롤로) 등 9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한편,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교구 설정을 전후하여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고자 노력했는데, 박해시대 동안에 김대건과 최양업(토마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뜨거운 신앙과 뛰어난 학식으로 신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으나 1년 1개월의 사제직을 뒤로하고 장렬히 순교하였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약 12년의 사제생활 동안 신도들을 위한 봉사와 성직자 양성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비록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활은 연속되는 순교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1866년에 시작된 ‘병인대박해’는 근 10년간 계속된 가장 혹독한 시련으로 선교사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요한) 등 8,000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16-4. 박해시대 교회에 관한 교훈

교회 창설 이후 100여 년에 이르는 박해 기간 동안 10,000여 명의 신도들이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기도하며 죽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시련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한국교회는 뜨거운 신앙과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 본받아야 할 몇 가지 교훈을 남겨 주었다.

첫째, 순교 선열들의 뜨거운 신앙심이다. 순교 선열들에게 하느님은 참으로 모든 것이었다.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모든 것을 얻고,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모든 것은 허무라는 것을 이분들은 깊이 깨달았다.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신명을 바쳐 이를 힘차게 증거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같이 굳센 믿음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모든 것에 앞서서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삶인 것이다.

둘째,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기를 친형제같이 하였다. 이들이 박해의 손길을 피해서 산간벽지로 피난살이를 할 때에는 서로가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아래 문초를 받을 때에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도왔던 것이다. 순교 선열들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박해자들까지 감동시켜서, 마침내 박해자들 중에서도 회개하고 영세 입교하여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

셋째,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천주교를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까지 인식했다. 교리에 내포된 평등사상은, 당시 신분제도를 비롯하여 불평등한 각종 사회질서 아래 신음하던 많은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사회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양반, 천민이라는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모두가 한 형제라는 우애를 실천하였다. 또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으며, 서자와 과부, 어린이 등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권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수용 당시부터 한글로 성서와 교리서를 옮기는 등 한글을 공용어로 사용함으로써 평등하고 보편적인 민중문화를 형성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초기 한국 교회 공동체에서 보여주었던 뜨거운 신앙과 형제적 사랑, 그리고 사회 혁신의 정신은 다소 수용되기도 하고 퇴색되기도 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16-5. 박해시대 교회에 관한 성찰

19세기 후반, 잇달아 체결된 구미 열강(歐美 列强)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와중에서, 1886년 프랑스와 맺은 한불수호조약은 불완전하게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선교의 자유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박해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신앙인 마을)’과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본당 조직이 발전하게 되었다. 서울의 명동에 주교좌성당이 건립되고,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서울 용산에 세워졌으며, 여러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선교사업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북간도에도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교회를 세우니, 현재도 북간도 지방은 한국교회의 관할권 밑에 속해 있다. 또한 교회는 교육운동과 언론운동을 전개해 1910년까지 124개의 학교를 설립하였고,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백성들에게 바른 판단을 제공하고, 열강의 다툼 속에서 민족 독립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특별히 안중근(도마) 의사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막고자 의병활동을 했었던 독실한 천주교인이었고,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교회 발전에 헌신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16-6. 교회의 발전과 사명

일제강점기의 속박과 억압 속에서도 한국가톨릭교회는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을 통해 순교복자를 모시게 되었다. 1942년에 노기남 신부의 서울교구 교구장 취임으로 첫 한국인 주교를 맞게 되었다. 8·15 해방의 감격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둘로 나뉘어져서 교회 역시 남북으로 쪼개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가톨릭교회는 더 큰 상처를 입고 수많은 이들이 신앙의 자유 때문에 또다시 삶의 터전과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전쟁 중에 가톨릭교회는 피해 복구와 이재민에 대한 구호활동을 통하여 복음 선포 활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전후에는 전쟁과 부패한 정치로 인한 피해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과업을 떠맡게 되었다. 1953년에 도입된 레지오마리애 운동은 평신도들의 신심과 활동을 성장시켰으며, 신용협동조합운동으로 신도들의 자립심을 키워주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62년, 한국교회는 명실 공히 독립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교회의 반성과 쇄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한국교회도 스스로의 쇄신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1984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기해·병오박해로 순교하여 ‘복자’로 시복된 된 ‘103위 한국순교복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집전으로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하여 ‘103위 한국순교성인’을 모시게 되었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했으며, 2014년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광화문광장에서 신유박해의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한 ‘124위 순교자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17.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Q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A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주시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셨다.

Q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은 무엇인가?
A 예수는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되기 이전부터 하느님이셨으며, 출생 이후에도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분을 낳으신 것이다.

Q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나셨다는 뜻은 무엇인가?
A 예수는 인간의 부부생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임신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Q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A 마리아는 성령의 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낳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은총을 언제나 보존하였음을 뜻한다.

Q 마리아의 원죄 없이 태어났음과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A 모든 인간이 원죄에 물들은 채 태어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를 임신할 몸이므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이러한 특별한 은총에 힘입어 죽은 후에도 그 육신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올려졌음을 뜻한다.

17-1. 성경 속의 마리아

우리가 마리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마리아 자신 때문이라기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아들이 세상 모든 것을 바꿔 놓으시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마리아에 관해서 길게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에 관한 기본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심은 그분의 수난, 죽음, 부활에 있었으나 점차 예수의 생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갔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충분한 언급은 신약성서 중에서도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온다. 루가 복음의 앞머리에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는 마리아가 중심인물이다. 또한 우리는 사도행전의 첫 머리에서 마리아가 위층 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시는 것을 본다. 요한 복음서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마리아가 아주 뚜렷이 드러나시는 두 장면, 즉 카나의 혼인잔치와 골고타의 장면으로 꾸며진다(요한 2,1-12; 19,25-27).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모세의 전통과 약속에 비추어 사색하면서,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성 마태오의 메시지 요점은, 인간 어머니에게서 나신 예수님이 구원의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을 백성들에게 가져온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지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좀 더 깊이 보게 한다. 그의 신학적 목표는 예수님을 신적 메시아와 주님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루카 1,26-38)는 성모에 관한 중심 계시이다.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라고 불린 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마리아의 역할이 특유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결과로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루가는 알려준다. 주님이 마리아 안에 계시고, 마리아가 총애를 받으시므로, 마리아는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루카 1,42), 성전에서의 시메온의 예언은 마리아를 메시아의 수난과 이어 주고 있다(루카 2,25-35).

요한 복음서는 마리아에 관해서 단지 두 번만, 한 번은 주님의 공생활 시초에, 또 한 번은 십자가 밑에서 말하지만 신앙이 두터운 이 여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우선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4)에서 당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었으며, 또한 골고타의 십자가 위에서 사용하신 ‘여인’이란 호칭은 예수님의 구속 사명과 마리아의 역할이 독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복음은 마리아가 제일 처음으로 기적을 요청하였다고 하는 사실(요한 2,1-11)로 보아, 마리아의 신앙이 예수님의 측근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골고타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하신 말씀은 마리아가 모든 신자의 영성적 어머니이심을 상징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17-2.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에 대한 성서 기록에 맞추어, 사도시대 직후의 신자들이 믿은 것은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것이었다.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을 낳은 자’,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낳은 이 교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결정짓는 교리로 확정되었고, 예수의 신성이 절대적임을 강조하는 교의로 확립되었다. 5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언급한 “테오토코스”는 성모 마리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하느님 됨을 정의하는 교의였으며,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설명하는 교의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은 말씀이 즉, 성삼위의 제 2위이신 성자로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육화(肉化)하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임신하여 낳은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의 어머니인 것처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마리아에게서 인간 육체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께 영원히 낳음을 받은 것이지만, 강생을 통해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임신하고 낳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17-3.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예수님의 어릴 때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힘에 의하여 임신되었고, 성령은 인간 아버지의 관여함이 없이 마리아를 ‘감싸 주었다’는 믿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마리아에 관한 모든 교리가 그러하듯이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도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은 자라는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사색해야 한다.

17-4.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으므로, 하느님은 미리 손을 써서 마리아가 말씀의 어머니가 되도록 자격을 갖추게 하셨다. 마리아가 받은 특유한 은총과 특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마리아는 우리 각자가 제한된 한도 내에서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도달해야 할 것을 가장 잘 표시해 준다. 마리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 신앙, 희망, 사랑으로 성장하도록 기도하신다. 우리 신자들의 경우에는 세례의 은총이 바로 ‘원죄없는 잉태’가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의 ‘동정녀 모성’에도 참여할 수 있다.

18.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이신 마리아
18-1.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가톨릭 신심은 마리아께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드린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의 구속(救贖)사업에 특별하게 관련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구속(救贖)사업이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칭호를 받으신다.

세례 때에 우리는 구속의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마리아는 임신의 순간에 이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은총을 받으셨기 때문에 개인의 죄와 사악한 성향이 전혀 없는 일생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만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과 호응도 완전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구속(救贖)의 첫 열매가 되시었다.

18-2. 중재자이신 마리아

교회에서 성모님께 드리는 호칭의 하나가 ‘중재자’이다(교회헌장 62). 그러나 이 호칭은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위치와 효능에 아무런 변동을 가져오지 않는다(교회헌장 62). 어머니로서 구세주의 구속사업에 참석하셨고, 그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신 만큼 만민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려는 구세주의 뜻에 중재자로서 참여하신다.

마리아의 중재 역할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직접 결합을 도와주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길이므로, 마리아를 만나 뵙는 이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다. 마리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데서 가톨릭 신자와 다른 그리스도인들 간에 상당한 오해가 생겨났다.

마리아는 항상 당신 아드님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현세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듯 이 천국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도 우리를 위해 전구한다. 그 중에서 마리아의 중재 능력은 각별하고도 가장 효험이 크다.

18-3. 마리아 공경 (성모신심)

교회에서 신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마리아께 공경을 드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바쳐왔다. 마리아 공경은 물론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교회헌장 66)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시므로 고귀한 품위를 가지시나 역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시다. 그러므로 마리아 신심에는 과장도 경시도 없어야 한다. 개인적인 마리아 신심은 교회 전례를 따르는 것이 좋다. 성모 공경은 그이의 아드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또 ‘삼종기도’나 ‘묵주기도’처럼 교회에서 매우 존중되고 권장되어 온 전통 깊은 개인 기도도 신앙의 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18-4. 교회의 전형(典型)이신 마리아

마리아는 교회의 한 지체이심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교회 공동체에서 특별한 역할을 차지하신다.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탁월한 모범으로 교회의 ‘전형’이 되신다.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친은 교회의 전형이다(교회헌장 63).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협조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형이 되신다. 당신 아드님을 도와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에로 인도한 마리아의 업적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충실히 계속하는 데 크나큰 모범이 되는 것이다. 교황, 주교, 사제와 부제, 수도자와 평신도는 구원을 전달하는 소명에 있어서 마리아를 모범으로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놓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늘 교훈이 되어 왔다. 마리아의 깊은 신앙생활, 겸손한 순종, 항구한 희망, 순결, 마음의 가난, 용기 있는 사랑은 각 신자에게 모범이 되신다. 부부와 부모들은 요셉과 예수님에게 바친 마리아의 사심 없는 사랑에서 빛과 영감을 얻을 것이다. 독신 사제와 수도자는 마리아가 동정의 몸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봉사하셨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기도정신과 헌신적 봉사에서 깨달음과 영감을 받을 것이다.

18-5. 성모승천

지상생활을 끝내고 마리아는 아드님께로 돌아가셨다. 몸과 영혼을 그대로 가지시고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 성모승천에 관해 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교리는 마리아의 성덕과 품위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의 목적, 죄, 죽음, 육신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죄에 물든 일이 없는 몸이셨기에 당신 아드님처럼 그의 몸도 무덤에 계시면서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을 낳아 주신 분이 육체를 갖고 하늘에 오르시어, 부활한 영광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승천하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여러 세기에 걸쳐 믿음과 신심이 전승되어 오다가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의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성모승천은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희망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18-6. 예수님의 양부 성 요셉

성가정의 기둥이요 성모의 배필이자 우리 구세주의 양부이신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가장 고귀한 소명 중의 하나를 받으신 것이다. 마리아처럼 성인도 하느님의 계시 말씀에 자기 마음을 온전히 열고 있었다.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임신하자, 요셉은 당황하고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서의 말씀대로 “의로운 사람”(마태 1,19)답게 행동했다. 요셉은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서로 동정을 지키기로 한 결혼이었지만 헌신적인 사랑의 결혼이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님은 사실이지만 요셉의 정성과 사랑 가운데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 태어났으며,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도 했다. 1870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성 요셉을 ‘전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인의 각별한 정의감과 성실성은 아버지와 근로자들이 특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19. 갈라진 신앙세계
19-1. 하나의 뿌리

유다교는 구세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유대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교 경전(구약의 오경 등)은 가톨릭 성경에도 들어 있다. 교회가 구약의 계시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민을 통해서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을 함께 받은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자손’(갈라 3,7)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양측의 위대한 공동유산을 상기시키며, “성경 및 신학의 연구와 형제적 대화와 존경을 권장한다.”(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4)

19-2.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 형제들

가톨릭교회는 하나이자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가치가 없다거나 불성실하다거나 그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깊이 귀의(歸依)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거룩한 특징을 간직해 오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며, 살아 있는 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일치와 사랑의 친교를 이룩하도록 만인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교회는 크게 세 교회, 즉 가톨릭교회, 동방교회, 개신교가 있다.

(1) 동방교회
동방교회는 동유럽과 중동지방에 퍼져있는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정확히는 ‘동방교회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과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 여러 교회를, 우리는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구별하여 동방교회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약 1억 5천만 명의 신자를 가진 동방교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뉜다. 그리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있는 총주교를 중심으로 20개 교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러시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불가리아 교회, 그리스 교회, 북미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조지아 교회, 사이프러스 교회, 세르비아 교회가 두드러진다. 각 나라의 동방 주교들은 총주교를 중심으로 뭉쳐있고, 이 총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동방교회 안에서도 그리스 정교회와 구별되는 다른 동방교회들은 콥트교회(이집트), 시리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터키 북동부와 옛 소련 남부 아르메니아 공화국), 에티오피아교회, 인도교회(인도 남부)로 나뉘어 있다.

동방교회의 전례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로마교회와 일치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기네 지역의 동방교회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다.

이들 동방교회 신자들도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과는 구별되는)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한다. 1054년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서로 단죄하고 분열하게 되었으나, 1965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단죄를 철회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동방교회 신자들은 로마 교황을 로마교회의 주교로는 인정하나, 그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2) 개신교
1517년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니, 이로써 많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나오게 되었다.

①루터교
루터(1483∼1546)의 신학 노선을 받아들인 루터 교회는 많은 점에 있어 가톨릭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심을 믿으며, 성서를 결정적인 최종규범으로 여긴다. 믿음만이 구원을 가져다주며, 인간의 선행은 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②장로교
스위스의 칼뱅(1509∼1564)의 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로서, 예정설을 믿으며 엄격한 도덕주의를 강조하고,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집념을 가지고 있다. 성서 봉독, 설교, 자율기도, 찬송가, 시편성가를 중시한다.
③침례교
이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성인세례만을 인정한다. 성서를 중심으로 삼으며, 신학적으로는 일반적으로 보수적 경향이다. 성직계급이 없으며,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을 인정한다.
④성공회
영국의 헨리8세가 자신의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16세기에 로마와 단절하고 영국식의 교회를 세웠다. 영국 캔터베리의 주교를 으뜸주교로 인정하는 성공회의 전례는 가톨릭과 유사하지만, 신부, 주교는 결혼할 수 있다.
⑤오순절교회
성서에 중심을 두면서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고, 갑작스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는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중요시한다. 세상 고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적, 경제적 차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가난한 나라의 정치가들, 기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3) 세계교회협의회(WCC)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되었으며, 전 세계 개신교 형제들의 300여 개 교회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각 나라에 지부가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한국교회협의회(KNCC)가 있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이 기구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19-3. 교회일치운동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일치운동, 곧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를 증진하는 데에 한 몫을 맡도록 부름을 받는다. 과거 수백 년 동안에 걸친 분열은 모두가 양측의 잘못에 기인한다는 점을 깨닫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한 연설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자행된 잘못에 대하여 하느님과 갈려나간 형제들 앞에 용서를 청하고, 마음으로부터 잘못을 표명함으로써 본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문제에 관해서 그들과 친교를 가지며, 먼저 그들에게 접근함으로써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첫째가는 의무는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것들을 가톨릭 신자들이 보다 성실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4).

한편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에게서 발견되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보화를 인정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일치 4) 일치운동을 실천한다고 해서 가톨릭의 정체(正體)를 감추거나 진리를 매장하라는 것은 아니다. 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교리는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19-4. 비 그리스도교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존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신 유일신을 우리와 함께 섬기고 있다.”(교회헌장 16) 이슬람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는 공경하며, 동정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기도 한다. 무슬림들은 “윤리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써 또 자선과 재계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비 그리스도교 3) 힌두교, 불교를 포함한 많은 비 그리스도교적 종교들은 여러 면에서 가톨릭교회와 다르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비 그리스도교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생활과 행동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계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비 그리스도교 2)

19-5. 무신론

교회는 무신론을 단호히 배격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대화는 시도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건설하는 데에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 일은 ‘성실하고 현명한 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사목헌장 21).

19-6. 선교하는 교회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 세상에는 복음의 소식을 전혀 혹은 거의 듣지 못한 사람이 많아, 해야 할 “선교 사업은 아직도 막대하다.”(선교 10)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과 성스러운 의무를 함께 갖는 것이며(1코린 9,16), 이로 인해 선교활동은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그 힘과 필요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선교 7)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가톨릭 교리의 가장 중요한 교의의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을 통한 응답은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기 의지를 거슬러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 교리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고, 교부들로부터 항시 설교되었다. 신앙행위는 그 성질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10)

20.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Q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생명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써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스승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에게서 인생의 길잡이, 모범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살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이 새 생명은 인간의 심원한 동경과 염원을 채워 주고도 남는다. 그리고 인간 생명에서 좋은 점들을 더 좋고 부유하게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실 사람들이 성삼위의 내면의 생명이라고 할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새 생명은 은총이며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인간은 받을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미리 뽑으시고, 사전에 그럴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없는데도 생명을 주신다. 하느님이 우리에 관해서 무엇을 ‘미리 정하셨다’고 해서, 우리를 꼭두각시나 로봇처럼 부리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인격체로 생각하여 부르시고, 사랑과 우애로써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기대하신다. 누구를 강제로 생명으로 부르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또 누가 멸망하기를 바라셔서 당신의 호의에서 따돌리시는 일도 있을 수 없다.

21. 인간생활과 하느님의 계획
21-1. 사람의 삶과 윤리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나는 지금 어떤 선행을 할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선행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도덕 문제와 직결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생활 안에서 서로 나누는 가운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사람은 하느님의 진·선·미의 모습을 지녔기에 늘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선하게 가꾸도록 부추겨진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진리'라는 소리로 심어 주셨기에 우리 안에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는 손짓이 늘 함께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보다 나은 삶과 온전한 선과 완전한 행복을 원하고 있다.

무엇이 가치 있고 정당하고 옳은지 분별하는 판단을 '양심의 판단'이라고 한다. 왜 가치 있는 것을 행하여야 하는가? 양심의 소리에 순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를 찾고, 이치에 따라 살고, 친교를 맺고자 하는 자발적 경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생과 인간 행동을 두고 일어나는 이 수많은 의문에 하느님이 해답을 주셨다. 해답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21-2.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정신을 따름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실 때에 그분은 진리를 찾으려는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신다. 이 호소에 따를 때 힘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그분을 본받도록 격려해 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신앙’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의 지성과 모든 재능을 다하여 당신 아버지의 바라심과 당신이 사람이 되신 목적을 깨달아 신앙생활을 키워가라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사랑’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곧 성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하느님의 눈길로 사물을 볼 때 바로 보게 된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그 계획을 따르기로 할 그 때에만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다. 보람 있고 바르고 도덕적으로 선한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 하느님이 보시는 대로 보고,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판단하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은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21-3. 양심

양심은 하느님의 소리이다. 하느님은 예외없이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통하여 당신의 기본 법칙을 알려 주신다.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불변의 기본 윤리 법칙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누가 악을 저질렀을 때는 본 사람이 없어도 그는 마음으로 괴로워하며 선행을 했을 때는 본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고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선과 악에 대한 느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양심의 명령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이것 역시 양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21-4. 잘못된 양심과 바른 양심

하느님이 인간 이성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인간의 이성은 때때로 흐려지기도 하고 그르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양심은 가끔 애매하게 되고 또는 습관과 환경에 따라 마비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바른 양심을 가지도록 윤리와 도덕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 양심의 소리를 보다 확실히 듣도록 하시기 위해 구약시대에 이미 십계명을 가르치셨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랑의 규범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신앙과 은총으로 비추어진 양심을 통해서 이러한 하느님의 소리를 명백히 듣는다. 신앙과 은총과 양심에 의한 권고만은 항상 확실하며 그르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앙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은총을 통한 양심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할 때 하느님과 가까워질 뿐 아니라 참된 행복과 기쁨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21-5. 자연법

Q 자연법이란 무엇인가?
A 인간 생활과 인간의 행위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기본 윤리 원칙들이다.

자연법은 인간 생활 및 행위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을 의미하며, 현세생활에서 인간 정신이 이 계획을 파악하고, 하느님과 합심하여 이 계획에 따라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자유 4).

교회가 ‘자연법’에 대해서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연법’이란 기본 윤리 원칙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독단으로 내리신 외적 명령이 아님을 강조한다. 기본 윤리 원칙은 우리의 본바탕이다. 올바른 양심만 있으면 식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은 주인이 하인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다. 교회가 ‘자연법’이라는 용어를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 원칙들이 만인에게, 모든 시대와 장소, 모든 문화와 상황에 적용되는 원리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자연법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보통으로는 계시를 통해서, 특히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입장이다.

21-6. 십계명

Q 십계명은 무엇인가?
A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반포하신 윤리의 기본 원칙인 열 가지 지킬 도리이다.

Q 십계명의 본뜻은 무엇인가?
A 십계명의 뜻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성과 모든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서 앞의 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관한 것이요, 나머지 일곱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관한 것이다.

계명은 사랑하는 법을 위해 주어진 규범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인간이 보다 행복하고 즐겁고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사랑의 규범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계명은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옛 계약에 나오는 십계명에 그것이 요약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새 법에 의해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도덕 명령이 구약성서의 두 곳, 탈출기(탈출 20,2-17)와 신명기(신명 5,6-22)에 나온다. 요약하면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간음하지 마라.
7. 도둑질을 하지 마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21-7. 그리스도의 덕

Q 덕은 무엇인가?
A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 은총에 힘입어 얻은 새 생활방식으로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마음의 건강함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자연법을 능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양자가 되게 한다.

은총으로 새로 난 사람의 새 생활방법을 ‘덕’(德)이라고 부른다. 덕은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여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게 한다.

21-8. 복음 삼덕(믿음, 희망, 사랑)

인간 천성에서 오는 덕이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충만한 친교를 이루고 살자면 그 덕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없이도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그 덕들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시고 새 방향을 주신다. 이렇게 승화된 덕을 신학자들은 ‘천부덕’(天賦德)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 넣어 주셨다는 뜻이다(로마 5,5).

하느님은 의화된 사람에게 성화 은총과 더불어 믿음, 희망, 사랑의 덕을 주시어,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느님의 사업을 이행하도록 하신다. 이 세 가지 덕행이 우리의 새 삶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는 뜻에서 대신덕이라고도 한다. 믿음의 은총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구원의 말씀을 알게 되며, 희망의 덕행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감을 주신다. 사랑은 하느님이 친히 주시는 온전한 마음과 힘과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덕행 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이며(1코린 13,13), 그리스도인의 윤리생활 전체는 이 세 가지 덕행에 기초하고 있다.

2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
22-1. 신앙

Q 신덕(信德) 즉, 신앙은 무엇인가?
A 신앙은 성령의 은혜로서, 하느님께서 밝히시고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더불어 확실히 믿는 덕이다.

22-2. 희망

Q 망덕(望德) 즉, 희망은 무엇인가?
A 희망은 하느님께서 태워 주신 덕행으로서, 예수의 공덕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을 바라고, 그 복을 얻기에 요긴한 모든 은총을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에 따라 굳이 바라는 덕이다.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상속할 무수한 형제자매의 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힘써야 한다(로마 8,29).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도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설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하느님의 성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

22-3. 사랑

Q 애덕(愛德) 즉, 사랑은 무엇인가?
A 애덕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덕행으로서, 온전히 착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또 하느님으로 인하여 이웃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덕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어 우리 마음속에 당신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신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내 직장의 동료들과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22-4. 죄

Q 죄란 무엇인가?
A 죄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동시에 미움과 질투와 교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Q 대죄(大罪)란 무엇인가?
A 대죄는 자유의지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거나 하느님과의 소원한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Q 소죄(小罪)는 무엇인가?
A 자신의 자유의지 없이 범하는 죄도 여기에 해당되며 가벼운 죄로서, 대죄와 달리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지는 않는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의 행위다. 죄는 하느님께 대한 인격적 침해요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알고 자유를 가지고서 한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본시 나쁜 행동도 무지나 자유가 없이 했을 때 죄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죄는 대죄와 소죄로 나뉜다. 대죄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거나 하느님께로부터 소외된 상태이며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포기한다. 대죄는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나 국가에서 세운 법을 알고도 자유로이 범할 때 성립된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했다면 그는 대죄를 범한 것이다. 대죄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고 사람의 생활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은 ‘대죄의 상태’에 있을 수가 있다. 즉 하느님 사랑에 귀의하지 않고 그분께 성실을 바치지 않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대죄를 범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전부에게 얻어 주신(요한 17,16) 풍부한 새 생명에 대해서는 온전히 죽은 몸이다. 뉘우치도록 하느님이 먼저 그를 움직여 주시기 전에는, 생명에로 돌아서기 위해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
소죄는 은총의 생명 및 하느님과의 친교를 전부 박탈하지 않는다. 인간의 나약성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들이다. 소죄는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의 실수요, 주저함이요, 잘못이다. 중대한 본분을 가벼운 정도로 범했을 때도 소죄가 된다. 도둑질을 하되 사소한 물건을 훔친 경우이다. 중대한 잘못을 범하긴 했으나, 온전한 의식과 자유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소죄가 되기도 한다.

22-5. 하느님에 대한 계명: 1∼3 계명

(1) 제1계명: 하느님만을 공경함

Q 제1계명이 명하는 것과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하느님만을 모든 것 위에 공경하여 높이도록 명하며,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사람이나 대상에게 드리는 것을 금한다.

Q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사람이나 대상에게 드린다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A 온갖 미신을 숭상할 때 그렇게 되는 것으로서, 마귀와 잡신을 섬기거나 점이나 사주팔자를 보면서 길흉화복을 미리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음

Q 제2계명이 명하는 것과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하느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부르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며, 거짓 맹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저주하는 것을 금한다.

(3) 제3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냄

Q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A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노동을 쉼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다.

Q 교회가 구약의 안식일(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지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A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발현하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 참된 의미로 교회가 세워진 날이기에 초대교회부터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게 된 것이다.

22-6.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다음으로 자신을 위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고 명하셨다. 올바른 자기 사랑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한다. 각자 자기의 구원과 참다운 선을 염려하고, 추구해야 하며, 이것은 사람의 첫째가는 도리이다. 그 대신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인간 생활의 중심은 하느님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선택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만은 죄의 뿌리이다.

이웃 사랑은 중요하며, 십계명 중의 나머지 일곱 계명이 바로 이것을 다루고 있다. 어느 면에서 이웃 사랑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 형제가 되며 그리스도와도 형제가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 올바른 자기 사랑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22-7. 윤리덕 (倫理德)

올바른 자기 사랑은 다음 몇 가지 덕행으로 지탱된다. 그 첫째는 겸손으로서 그리스도교 덕행 중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다. 자기는 일개 피조물이요, 자기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하찮은 자아를 뽐낼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함을 깨닫게 만드는 까닭이다. 겸손은 아무리 비상한 자질을 타고 났어도 모든 것이 하느님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린다.

인내도 매우 필요한 덕이다. 사람이 바라는 모든 희망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부활에 앞서 십자가가 있고, 하느님이 정해두신 때를 기다려야 하는 세상에서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자면 인내가 필요하다.

절제, 혹은 자제심이 없으면 자기도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 자제심 있는 사람은 당장의 만족을 요구하는 행동과, 우정과 희망을 깨뜨리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기 보다는, 분별과 신앙의 빛이 가리키는 참 선을 추구한다. 그릇된 자기 사랑으로 눈앞의 것을 갈망하는 방종은 자신을 파괴한다. 나약한 인간성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로마 7,24) 위에 말한 덕행을 쌓을 수 있다.

23. 가치 있는 생활 (5·6·8·9 계명)
23-1. 제5계명 : 생명의 존중

Q 우리는 왜 몸과 생명을 존중하는가?
A 우리의 몸과 생명은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또한 세상 마칠 때에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Q 제5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자기 자신이나 남의 영혼과 육신을 해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며 인간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므로 인간이 생명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살인, 자살, 신체 절단, 안락사, 낙태 등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이외에도 인간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의 보호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1) 세 가지 기본적 가치
세 가지 기본적인 가치 즉 생명, 출산, 진리는 사랑과 정의의 구체적 행동으로만 이루어지고 키워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면 행동을 제한하고, 살인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우리의 소명은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기본적인 가치가 충만케 함으로써 개인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을 보이라는 것이다. 실생활에 있어서는 보통으로 한 가지의 가치에만 주로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아마 의사나 간호사, 구급차 운전기사, 병원 직원, 소방관 등 생명 보호에 직접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도 있고, 농부나 기타 직업도 간접적이지만 같은 생명 보호에 헌신하는 것이다.

(2) 생명의 존중
사람은 육체적 생명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로써 자기 생명을 보존할 의무를 가지는 동시에,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곤경 중에 있는 사람을 도울 중대한 의무도 갖고 있다(마태 25,41-46). 자살도 살인도 불가하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사목헌장 27) 행동이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죽음을 가져오는 모든 행동이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라는 제5계명은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탈출 23,7)로 알아듣는 것이 더욱 정확할 듯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전쟁 행위를 악행으로 정죄(定罪)하진 않는다.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 사람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생명에 대한 정당방위는 살인이 될 수 없다. 진정 가해자의 불의한 폭행을 막을 다른 길이 없다고 인정되면, 합법적 권력자가 제정한 법에 따라 가해자를 처형하는 것을 교회는 정죄하지 않았다.

순교자의 의도는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하느님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분명히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내거는 행위 또한 자살과는 구별된다.

(3) 낙태
낙태의 희생자는 확실히 무죄하고, 특히 무기력하다. 양육 부담 즉, 경제적 어려움은 이해할 만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태아를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낙태 행동에서 인간의 기본 가치에 대한 멸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 뚜렷한 정의심의 부재를 본다.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이 함께 위태롭게 되는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무죄한 인간 생명을 직접으로 그리고 고의로 침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원칙은 유아의 생명이나 어머니의 생명에도 적용된다.

23-2. 제 6·9 계명: 가정과 순결

Q 제6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제6계명이 금하는 것은 간음(姦淫)과 사음(邪淫)뿐 아니라, 온갖 부정한 행실과 그 위험한 기회까지이다.

Q 제9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제9계명이 금하는 것은 온갖 음란한 생각과 음란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23-3. 제8계명: 거짓 증언

Q 제8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제8계명이 금하는 것은 거짓된 증언과 나쁜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24. 의로운 사회 건설 (4·7·10 계명)
24-1. 두 가지 기본 원칙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믿음, 희망, 사랑의 기본적 요구 조건을 실행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두 가지 기본원칙에 기초를 둔다.

첫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지 않을 때 또한 그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거나 봉사받지 못할 때,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할 때 완성을 이룰 수 없다.

둘째, 사람은 하느님에게 깊은 개인적 투신을 하지 않을 때도 완성을 이룩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이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고, 하느님과의 개인적 접촉을 갖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24-2. 평등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 왜냐하면 “만인이 이성(理性)을 지닌 영혼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기원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된다는 같은 목적에로 함께 부름을 받았으므로 모든 사람의 기본적 평등은 더욱 명백히 긍정되어야 하기”(사목헌장 29) 때문이다.

24-3. 공동선(共同善)

공동체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뭉쳐 있다. 공동선이란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이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생활상 여러 가지 조건들의 총체”(사목헌장 26)이다.

24-4. 상호 보완의 원리

상호보완의 원칙은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단체에 맡기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하급의 작은 단체가 이행할 수 있는 기능과 봉사를 상급의 큰 단체에 떠맡기는 것도 부정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바른 질서의 교란이다. 모든 사회활동은 본질상 사회 조직체의 성원을 돕는 것이지, 그 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 된다.”(어머니요 스승 33)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하나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할 경우에만 더 큰 집단이 그 임무를 맡아야 한다.

24-5. 제4계명 : 가정 공동체

Q 제4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제4계명이 명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과 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할 본분이다.

Q 자녀의 부모에 대한 본분은 무엇인가?
A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명하며, 영혼과 육신의 모든 문제를 도와 드리는 것이다.

Q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무엇인가?
A 부모는 자녀가 종교 교육과 도덕 교육을 받도록 힘쓰면서 그들의 생활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1) 부부 공동체
부부 공동체는 ‘인간 사회의 시작이고 기반이며’ 사회의 활력 있는 기초 세포가 되는 것이다(평신도 11).
따라서 “국가 권력은 혼인과 가정의 본질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향상시키는 동시에 공중도덕을 수호하고 가정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성스러운 임무로 알아야 한다.”(사목헌장 32) 특히 “정부시책에 있어서는 주택, 자녀교육, 노동조건, 사회보장, 납세 등에 관한 가정의 요망을 고려해야 한다.”(평신도 11)

정부는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국내의 인구증가 문제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사목헌장 87) 그러나 정부와 공권자의 기능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혼과 산아에 대한 인간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에 따라 출생할 자녀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양친의 바른 판단에 달린 것이므로, 절대로 공권의 판단에 맡길 수는 없다.”(사목헌장 87)

(2) 자녀교육
“양친은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자녀를 교육해야 하는 중대한 의무를 진다. 그러므로 양친은 자녀의 첫째이며 으뜸가는 교육자로 인정되어야 한다.”(교육 3)

(3) 부부의 평등
남녀는 인간 존엄과 기본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사목헌장 29).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혼인은 실질적으로 동등한 사람들의 결합이지만, 한편으로는 두 당사자가 고유한 역할을 가지므로 서로 충족시키고 완성한다.

(4) 부모와 자녀 관계
부모에 대해서 이행해야 할 자녀의 의무는 부모의 분명한 지시에 그저 복종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면서 평생 동안 부모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사목헌장 48).

자녀들이 복종하는 동기는 공포에 있지 않고 사랑, 감사, 겸손에 있어야 한다(집회 7,27-28). 자녀들이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나면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며, 결정을 대신해 줄 권리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24-6. 제4계명 : 이상적 정치 체제 - 정부와 국민

인간성에 완전히 부합하는 정치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를 설정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여러 기관들의 영역과 목표를 규제하며, 위정자를 선출하는 활동에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사목헌장 75)를 모든 국민에게 주는 공동체이다.

정부는 명령할 권리가 있다. 합법적 정치권력이 윤리질서의 한계 내에서 공동선을 위해서 행사될 때 국민들은 “복종해야 할 양심상의 의무를 가진다.”(사목헌장 74) 위정자가 윤리질서에 위배되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법이나 긴급령을 제정한다면, 그런 명령은 국민의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 “사람에게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기 때문이다”(사도 5,29) 국민들이 자연법과 복음이 정한 한계를 지키면서, 공권의 남용에 대항하여 자신과 동료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합법적이다(사목헌장 74).

권리의 악용을 억제하는 것도 정부의 의무이다. 양심을 지도하거나 엄밀한 면에서의 개인적인 행동을 통제할 권리가 정치 권력자에게는 없다. 정치 공동체는 유일한 완전한 사회도 아니고, 국민의 영성 생활에 대하여 정당한 통할권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영성 생활의 증진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은 교회 안에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참된 공동선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무를 자각하고, 국가 권력이 올바로 행사되고 국법이 윤리 원칙과 공동선에 일치하도록 그 의견을 관철시켜야 한다.”(평신도 14)

24-7. 제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Q 제7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A 불의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치고 그러한 일에 협력할 뿐 아니라, 자기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금한다.

불의하게 타인의 물건을 빼앗는 행위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 강도, 절도, 소매치기, 사기, 속임수 장사, 과대광고 등을 금하는 계명이다.

(1) 사유재산권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과 정의 안에서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사목헌장 60) “그러므로 누구나 이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사목헌장 69) 한걸음 나가서 “사람이 극심한 빈곤 중에 있으면, 필요한 것을 타인의 재화에서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사목헌장 69) 경제 활동과 생산의 기본 목적은 인간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교회는 개인이 사유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각 사람의 재물에 대한 소유권과 기타 통할권은 인격의 발전에 봉사되고 쓰여야 한다. 재산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므로 알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사치와 허영에 들떠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도 이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다.

(2) 노동
인간은 자기의 노동에서 나오는 보수의 일부를 저축하기로 자유로이 결정하는데, 정당한 보수는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제공할 정도의 것이라야 한다.”(사목헌장 69) 동시에 기업체를 형성하고, 노동조합을 세우고, 경제 활동에 있어서 노동자의 참여를 신장하는 방법을 강구할 권리도 인정한다(어머니요 스승 82∼103; 108∼121).

24-8. 정의와 평화

정의 없이는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므로 모든 사람은 평화와 동시에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평화는 정의의 산물이고 사랑의 결실이다. 평화는 불목의 근본적인 뿌리까지 극복시킨다. 국가 간의 극심한 경제적 불균형도 긴장의 원인 중의 하나이다. 기타 원인은 권력을 과도히 추구함과 인권을 멸시하는 데도 있다. 좀 더 깊은 원인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고, “인간적 질투, 불신, 교만, 기타 이기적 사욕에 있다.”(사목헌장 83)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관심은 영생이며 그 영생은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고 자비, 정의, 평화를 추구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

25.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
25-1. 그리스도인의 첫째가는 계명

우리는 실제로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길, 사랑의 길 뿐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위대한 사랑의 두 가지 계명은 서로 보완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현세적 요구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최소한의 사랑, 즉 약간의 기도와 주일미사에 겨우 참여하고 대죄를 피하기는 하되 이웃 사랑의 실천이 냉랭하다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내적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은 친척이나 친구나 친지들만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신자들의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형제로서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

25-2. 평신도 사도직

하느님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셨다. 즉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예언자요 사제이며 왕이 되도록 부르셨다. 이것을 우리는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한다.
우리는 각자가 처해 있는 곳에서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신앙과 사랑으로 무장한 평신도는 자신이 받은 소명 안에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이 세상을 새로 건설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동시에 정의와 사랑에 기반을 둔 현세 질서를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세례성사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각 신자는 자기의 생활로써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 평신도 사도직은 ‘생활의 증언’ 만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사도는 말로써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찾는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신앙에로 인도하고, 신자들을 가르쳐 굳세게 하고, 더욱 열심히 살도록 격려한다.”(평신도 6)

평신도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면 영성 훈련과 신앙에 관한 교리교육과 사도직에 관련되는 학문과 기술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개개인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준비할 수 있으나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단체도 있다. 많은 이들이 신심회, 자선단체, 사도직 단체, 혹은 제3회 등에 가입함으로써 사도직을 위한 교육에 도움을 받는다. 이런 단체를 통하여 평신도는 성직자와 보다 더 직접적이고 밀접히 협력하게 되고, 교회 일치와 공동체적 성격을 잘 조화시키면서, 교회가 사도적 목표를 향하는 데에 자신들의 기술과 경험을 바치게 된다.

25-3. 수도 소명

모든 사람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좀 더 훌륭한 삶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사람은 좀 더 큰 자유 안에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 안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수도생활에 들어가는 이들은 완덕에 대한 복음적 권유 즉 정결, 가난, 순명을 지키기로 맹세한다.

복음적 권유를 지키면서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려는 결의는, 인간적 판단과 세속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이 당연히 추구하는 여러 가지 자랑스러운 목표, 즉 혼인으로 이루는 신앙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가정, 재산의 소유, 정당한 자기주장 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필리 3,8) 그들은 온전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청빈 서원으로써 수도자는 개인재산이나 재산관리를 포기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 그리스도를 본받고(2코린 8,9), 세상 물건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피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가난하고 미소(微少)한 많은 형제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려고 한다.

독신자는, 인간의 성(性)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사랑은 오직 한 가지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수도자는 순결로써 “하느님이 제정하였고, 내세에서 완전히 드러날 혼인, 즉 교회가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랑으로서 차지하는 저 경탄스러운 혼인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환기시킨다.”(수도생활의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 12)

순명의 서원도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순명이 덕행이라고 보기 어려워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본받는 순명이 인간의 정신을 풍요케 한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순명은 비굴하거나 노예적인 순명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내신 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굳은 의지로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셨다.

25-4. 관상 수도회

세계와 인류 전체를 위하여 의미있는 일들 중에서 기도, 순명, 극기, 고립, 침묵의 생활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는 언제나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관상 수도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항상 뛰어난 역할을 감당하였다.”라고 교회는 주장한다.

현대인에게 심각한 위험과 유혹은 지나친 활동주의이다. 외적 행동만으로는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떠나서는 아무 궁극적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은수자의 생활과 관상 수도자의 숨은 생활은 특수한 부르심이다.

26. 은총과 신성(神性)에의 참여
Q 은총이란 무엇인가?
A 은총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거저 주신 초자연적 은혜이다.

Q 은총은 몇 가지가 있는가?
A 생명의 은총(상존은총 常存恩寵)과 도움의 은총(조력은총 助力恩寵) 두 가지가 있다. 생명의 은총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을 뜻하며, 도움의 은총은 우리가 선(善)을 행하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26-1. 은총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거저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보시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다.

26-2. 의화

사람은 원죄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 1,13)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화이다. 우리는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4)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자녀가 된다(1요한 3,1).

26-3. 생명의 은총(상존은총)

하느님은 인간에게 다가와 은총을 베풀며, 이 은총은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하도록 만드신다. 이 생명의 은총을 상존은총이라 부른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느님이 먼저 주도권을 쥐시고 우리를 성화하는 능력을 선사하신 점에서 성화은총이라고도 부른다.

생명의 은총은 지속하는 선물이다. 그래서 성화은총을 상존(常存)은총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이 은총을 받으면, 그 사람이 대죄로써 자신과 하느님을 분리시키지 않는 한, 이 은총은 머물러 있다. 성화은총을 보존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화은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주님과의 친분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인간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가거나 죽음의 시간이 닥쳐올 때에, 하느님과의 우정 관계에 머물 필요가 있다고 교회는 자주 가르친다. 사람이 은총상태에 있지 않으면서도 ‘산 사람의 성사’(견진·성체·혼인·성품 성사)를 받는 것은 중죄이다. 성화은총 중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

26-4. 성령의 은혜

성령은 모든 은총의 샘이시기에 은총과 더불어 성령의 은혜도 주어진다. 구약성서에서 성령이 구세주에게 슬기, 이해, 의견, 용기, 지식, 신심,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이사 11,2-3). 성령의 은혜는 사람이 하느님의 음성과 충동에 보다 빠르고 쉽게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 시켜주며 ‘복음적 행복’(마태 5,3-10)을 갈망하도록 부추긴다.

26-5. 도움의 은총(助力恩寵)

도움의 은총(조력은총)은 우리가 실제로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이다. 조력은총으로써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보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시어 당신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빗나갔을 때에는 돌아오게 하신다. 내적 조력은총이란 우리가 자유로이 구원의 활동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기를 주시고 도우시는 선물이다. 외적 조력은총은 하느님이 우리를 움직이시어 당신을 알게 하고, 당신의 삶에 참여하게 하는 데에 사용하시는 모든 도움이다. 하느님은 신앙에 열심한 부모, 충실한 친구, 좋은 책, 훌륭한 음악, 병고와 시련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다.

26-6. 죄의 일곱 가지 근원

Q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무엇인가?
A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교만, 탐욕, 색욕, 분노, 탐식, 질투, 게으름이다.

의화된 후에도 사람 안에는 죄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은총상태에 있으면서도 죄로 기울어지는 것을 우리는 체험한다. 이런 악에로의 경향 혹은 욕정을 성 바울로는 '죄'라고 부른다. 그 경향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향이 ‘죄’라고 불리는 것은 죄악을 낳고 죄악에로 기울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욕정은 여러 가지 죄 즉, 교만, 탐욕, 색욕, 분노, 탐식, 질투, 태만과 이런 경향에로 기울어지게 한다.

26-7. 은총 안에서의 성장

은총은 생명을 주므로 우리는 은총 안에서 자라야 한다. 사람이 세례 받을 때에는 은총상태에 있으나, 새로 태어난 우리는 아직 어린이에 불과하다(1베드 2,2). 우리가 사랑을 행하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신앙 안에서 자라야 한다(에페 4,15).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2코린 6,6).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열매 맺도록 협조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더 풍부해지고, 기도 중에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며,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결합한다.

27.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
Q 기도란 무엇인가?
A 기도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27-1. 기도하는 이의 모범이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 기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가 복음은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주 묘사한다(루카 3,21; 5,16; 9,29; 10,21). 그리스도는 중대한 행동이나 사목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드러나게 혹은 은밀하게 기도하셨다(루카 4,1).

예수님은 사도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기도의 완전한 모형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거만하지 말며 성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와 은총의 생명이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히 복종하려는 마음으로(루카 11,9-13) 기도하므로 이기적인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의하면 어떤 은총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만 내려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기반을 둔 삶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써 표현되어 나온다.

27-2. 기도의 3가지 효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세 가지이다. 이는,

첫째,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뿐 아니라 다른 혜택을 얻게 하여 마음이 영성적으로 원기를 얻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기도 형태를 따르면 기도는 사람의 삶을 변형하는 효과를 낸다. 우리는 먼저 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친 활동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 활동이 기도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자주 몸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다.

셋째, 기도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을 새롭게 한다. 태도와 가치관의 복합체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다듬고 가꾸고 훈련해야 한다. 기도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의 평화, 자신 안에서 느끼는 조화로운 질서와 균형, 하느님 안에서 영원의 눈길로 이 세상을 보는 눈, 자신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누는 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점차로 가까워지게 한다.

27-3. 기도의 정의(定義)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기도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감사하며, 그분에게 은혜나 용서를 청한다.

현대에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정의 내린다. 기도는 대화이며, 하느님이 먼저 시작하시어 이미 첫 마디를 발표하셨다. 즉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미사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가톨릭 전통은 기도의 기반으로서 성서를 읽을 것을 적극 권장하며, 기도와 관상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 하였다.

27-4. 기도의 4가지 종류

목표나 이유에 따라 기도는 네 종류가 있다.

흠숭 기도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절대적 의존성을,
감사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청원 기도는 무엇을 위한 요청을,
통회 기도는 죄에 대한 통회를 나타낸다.

기도에 있어 이와 같은 요소는 서로 겹치는 것이 보통이다. 하느님께 향한 모든 참된 기도는 자연스럽게 흠숭, 감사, 통회가 포함되어 있다.

27-5. 무엇을 청할 것인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무엇을 원할 때에만 하느님께 나아가 청하고서 그것을 즉시 얻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기도를 중단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 그리스도교적인 태도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루카 11,13). 그러나 우리는 가끔 눈앞에 당장 보이는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로운 것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나 청원기도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정신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오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은총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체적 물건이나 재산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면 기도로써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해로운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가 평생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27-6. 참된 기도를 위한 기도자의 자질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몇 가지 자질이 필요한데 그 중에는 정신 집중, 열심, 신뢰, 인내가 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뜻하지 않은 분심이 인간의 약점 때문에 일어나도 이런 분심은 기도의 가치를 파손하지 않는다. 기도는 정신의 활동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것이다. 열성적 행동에 평화와 즐거움이 따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도하기가 어려울 때라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며 하느님께 뜻을 굽힐 수 있다. 주님은 신앙에 기초한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1,25).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이다(야고 1,6).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다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루카 18,1).

27-7. 기도의 대상

그리스도인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기도한다. 삼위 모두에게나 삼위 중 한분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다(요한 14,14). 우리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모와 천사와 천상 성인을 향한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절대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를 드린다. 성모와 성인에게는 다른 종류의 공경을 드리면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그들에게 청한다(교회헌장 67).

28.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28-1. 개인기도

주님은 개인기도를 권장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개인기도를 위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장소나 자세는 자유롭게 기도에 적합하도록 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관습은 아침기도, 저녁기도, 식사기도를 상당히 장려하며, 위험과 유혹을 당할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면 개인기도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개인기도는 전례기도를 위한 준비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개인기도를 잘 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주일미사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 소리기도(염경기도)

소리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말한다. 소리기도는 지정된 기도문이나 자신의 말로 할 수도 있고, 큰 소리를 내거나 소리 없이 바쳐지기도 한다. 소리기도는 기쁠 때 또는 위험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으로 소리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시편, 삼종기도, 묵주기도 등과 같이 지정된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암기할 기도문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통회의 기도, 묵주 기도 등이 있다.

스스로 하는 기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기도의 일종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예배의 응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저절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히 긴 기간 동안을, 특히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상태가 고조된 것도 아니고 침체된 것도 아닌 담담한 시기가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기도해야 한다. 어떤 열성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간단없이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2) 마음기도

마음기도의 특성은 마음속으로 깊이 하는 것이다. 이때 지능과 의지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향해져 있다. 마음기도는 하느님께 더 일치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을 이 마음기도에만 바치면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음식 만들기나 운전 등 무엇을 하면서 내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마음기도는 영성생활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성덕은 하느님의 정신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이래 영성저자들은 마음기도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 3단계를 묵상, 애정기도, 관상이라고 부른다. 기도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틀에 박힌 묵상에서 좀 더 단순하고 직접적 관상에로 진전한다.

①묵상(默想)
묵상은 사색적인 기도이며 하느님과 성인들과의 일치를 이루며 어떤 결심에 이르게 한다. 교회의 초기 교부들과 수도자들은 지정된 시간에 영적 서적이나 성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묵상의 최초 형식 중에 하나이고, 가장 단순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묵상 방법은 준비, 마음기도, 결론에 이르는 세 요소를 지닌다. 묵상의 먼 준비는 묵상자의 생활 전체이다. 가까운 준비는 조용한 곳에서 성서나 다른 종교서적의 일정한 부분을 읽고,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두고, 자신이 묵상을 잘 하도록 글이나 행동으로 청한다. 묵상의 주요 부분은 주제에 관한 성실한 고찰이다. 묵상기도는 기억, 상상, 이해, 애정 등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와 그 메시지에서 영성적 성장을 위한 기초를 세운다. 묵상으로 더 풍요로운 신앙의 신비에 이르고,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마태 22,37),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할 동기를 찾으려고 한다. 묵상을 끝맺을 때 하느님, 성모님, 어느 특정 성인과 친숙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결심은 자신이 더 열렬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깊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②애정기도(愛情祈禱)
마음기도 중에 좀 더 진보된 형식을 ‘애정기도’라 한다. 이 기도에서는 분석을 위한 사색의 부분이 별로 없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하느님 안에 이미 든든하게 뿌리박고 있어 하느님께로 빠르고 쉽게 들어간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배웠으나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갈망한다. 물론 애정적 요소는 초보자의 기도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단순하고 깊은 애정기도는 기도자가 상당히 진보하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③관상(觀相)
마음기도의 최고 단계는 관상이나, 관상 자체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관상은 성실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에게 현세에서 내려지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최고 단계에 이른 관상기도는 지복직관(至福直觀: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함. 이것이 천국의 행복한 상태임)에 도달하기 전에 가질 수 있는 하느님과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사람을 인도한다. 관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풍요한 체험을 주고, 커다란 기쁨과 평화도 가져 온다. 진정한 관상기도일 때 그 기도는 생활 전체가 하느님께만 온전히 바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3) 합동기도(合同祈禱)
합동기도는 실제로는 하느님께 드려지는 개인 소리기도인데,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큰 소리로 드려질 뿐이다. 합동기도는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바치는 것이므로 개인기도와는 약간 다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에서 드러난 신앙의 증언과 투신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합동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찬미와 관상생활로의 복귀,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소망,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자세, 성서를 정신 차려서 읽고, 관대한 형제애, 교회를 위한 봉사에 공헌하려는 의지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를 간직하자면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8-2. 전례기도

전례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뭉친 하느님 가족의 기도이다. 전례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머리와 지체가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이다. 전례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자격으로가 아니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개인기도는 예배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리도록 도와준다. 반면에 교회의 공적 전례기도는 개인기도의 주축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사, 성사, 성무일도, 공식 예배는 교회 전례의 일부이다. 전례에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으로 이것은 외적인 행동과 말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요소이다. 그렇지 못하면 종교는 의미와 내용이 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다. 마음과 정신이 완전한 삶을 추구하면서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을 때 하느님을 제대로 공경할 수 없다.

(1) 미사(MISSA)
그리스도교적 모든 전례 중에 첫째이자 그 핵심이 되는 것은 주님이 최후만찬 중에 세우신 성찬 제사 즉, 미사이다. 미사는 바로 이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의 신비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재현한다.

(2) 성무일도(시간전례)
교회의 전례행위 중에 성무일도가 있다. 성무일도에는 말씀기도,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밤기도 혹은 끝기도가 있다. 성무일도에는 시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주로 성경구절이 많다. 그리고 전례주년과 성인들의 축일의 주기적 변동에 따라서 매일 새로운 기도 형태가 있다. 성무일도는 전교회적인 것이므로 평신도들을 포함하는 모든 신자들은 성무일도 특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참여하라고 초대되었다.

(3) 교회 전례기도의 특성
교회의 전례기도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전례예배의 최고 집전자이시다. 성품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결합한 이들이 전례 집행을 지도한다. 전례는 언제나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다. 즉 전례는 교회의 신자들을 단합시키고 그들의 참여를 요청한다. 전례를 변경시킬 권한이 없는 사람이 신비체의 기도를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 전례는 교회 전체에 속하는 것이지 개개 집행자나 전례 안에 특수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3. 기도 습관의 교육

부모들이 기도를 잘 배우도록 자기 자녀들을 배려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도에 관한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아침저녁과 식사 때에 기도하는 습관과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어린이들도 따라서 하도록 해야 한다.

29. 파스카 신비와 성사생활
Q 그리스도는 어디에 현존하시는가?
A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전례 안에, 전례를 드리는 사제의 인격 안에, 신자들이 모여 공동기도를 바칠 때, 성서의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

29-1. 그리스도의 현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례 안에 현존하신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교회 안에 특히, 전례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서 그 능력으로써 현존하시기 때문에 누가 세례를 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7)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체들이 모여서 공동기도를 바칠 때에도 현존하신다. 이때에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어 백성들과 하느님이 맺으신 계약으로 둘러싸인다. 예배에는 공동체 전체가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협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에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전례헌장 7)

29-2. 파스카의 신비

Q 파스카 신비란 무엇인가?
A 파스카 신비란, 좁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말하나 넓게는 그리스도의 강생으로부터 그분의 재림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신비를 말하며, 파스카 신비의 목적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계속적으로 재현하며, 따라서 파스카 신비는 교회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파스카 신비 곧 당신의 복된 수난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써 완성하셨다. 이렇게 친히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이기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주셨던 것이다.”(전례헌장 5)

파스카 신비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정점을 이루는 이 계획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완성된 것이며, 인간의 역사에서 점차로 밝혀지고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아질”(에페 1,10) 때에 완성된다. 그로 인해 벌거벗고 십자가형을 받은 종은 이제 아론을 대신하여 멜키체덱의 제도를 따른(히브리서 7장) 인류의 대사제로 등장하였다(히브 8,1-8).

29-3. 성사(聖事)

Q 성사란 무엇인가?
A 성사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은총을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해 주실 때 사용하는 눈에 보이는 표지들로서, 짧게 말해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외적 표지이자 그 도구이다.

Q 성사는 몇 가지가 있는가?
A 세례(洗禮),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해(告解), 병자(病者), 성품(聖品)과 혼인(婚姻)성사로서 모두 일곱 가지가 있다.

‘성사’라는 말은 ‘신비’(mysterion)라는 그리스어에 해당하는 라틴어 사끄라멘뚬(Sacramentum)에서 온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얻어진 풍요한 은총과 진리를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실 때 사용하는 눈에 보이는 표지들을 가리킨다. 신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고 교회는 선언한다. 그 일곱 가지 성사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이다

각 성사는 물, 빵, 포도주, 기름 등과 같은 물질과 사람의 몸짓이 결합하여 표지를 이룬다. 그런 물질적 요소가 신앙의 표지가 되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의 도구가 된다. 성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전례 행위를 통해서 성사로써 상징되는 은총을 실제로 주시는 데에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이와 같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실을 표지로써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는 각 성사가 지니는 고유한 뜻을 표현하는 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

성사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성에 적용된 표현 양식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힘을 행사하신다. 성사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손을 뻗치신다. 그리스도의 성사적 행위는 당신의 모든 약속이 채워질 때까지 어디서나 계속될 것이다. 모든 성사적 예식에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과 승천의 신비에로 인도된다.

29-4. 성사가 유효하기 위한 조건

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성사는 신앙의 표지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행위이므로, 그리스도가 지정하여 교회에 맡긴 표지 외의 다른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 표지가 가지는 효력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사 집행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되려면 교회 안에서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

성사는 거룩한 행위이므로 집행자는 큰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거행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늘 가르쳐 온 것처럼 성사의 유효 여부는 집행자의 성덕에 달려 있지는 않다. 성사의 효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성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사를 효과 있게 받기를 원하는 성인(成人)에게는 신앙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은총을 받을 개인적 원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전례는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선포한다. 신자들이 전례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기를 교회는 원한다. 그러므로 성사의식은 기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기쁨을 가지고 집행되어야 한다.

29-5. 준성사(準聖事)

Q 준성사(準聖事)란 무엇인가?
A 준성사란, 성사를 모방하여 교회가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를 위한 표지로 사용되는 물건과 행위로서 악마를 쫓음(구마 驅魔), 축성(祝聖), 강복(降福), 성화(聖畵), 성수(聖水)와 같은 것들이다.

교회에서는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그것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집행되기 위해 그 성사에 부속된 예절을 정하고 있다. 이 예절로써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성사의 거룩함과 귀중함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그 마음에 합당한 믿음과 사랑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절이 준성사이다.

그런데 준성사는 성사와 관련된 것도 있지만 성사와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중에 특별한 것은 축성과 강복하는 예절이다. 이렇게 준성사는 성사와는 다르지만 성사를 잘 받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고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가진다. 따라서 준성사에 의해 축성된 것은 모두 거룩하므로 존경심을 가지고 공손히 취급해야 한다. 그러나 성패, 묵주, 상본 등에 지나치게 의탁하고, 경솔하게 세속적인 일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30. 세례성사(洗禮聖事)
Q 세례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A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으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한 일원이 된다.

Q 세례성사를 받는 사람은 교회 앞에서 무엇을 약속하는가?
A 악의 경향과 유혹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한다.

Q 세례성사의 통상적 집전자는 누구인가?
A 주교, 사제, 부제가 통상적 집전자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세례성사를 베풀 수 있다.

Q 세례성사의 예식은 어떠한가?
A 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세례경을 외운다.

30-1. 세례성사를 주는 시기

(1) 부활성야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성탄, 부활, 성모승천 대축일(8월15일)과 기타 각 본당의 사정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세례성사를 베풀지만, 전통적으로는 부활성야, 즉 부활주일 전날 밤이 세례성사를 위한 시기이다.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약 8개월간 예비신자로서 교리교육을 받은 후 사순절(부활을 준비하는 부활 전 40일간)에 집중교육을 받고 부활성야에 세례성사와 견진 및 성체성사를 받는다. 사순시기가 초대 예비신자들에게 세례 전 교육기간이었듯이 부활성야는 세례 준비, 세례 서약, 신앙 갱신 준비를 위해 가장 적당한 때이다.

(2) 사순절
사순절은 극기와 신앙 갱신의 기간이므로 공동체 전체의 것이다. 사순절은 예비신자의 교육기간이지만 영세자를 위한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는 부활성야에 세례 서약을 갱신하면서 세례의 체험을 재생하고, 세례의 이해를 깊게 할 기회를 갖는다.

모든 극기 행위는 세례가 요청하는 완전한 개종,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사랑의 충동 하에 생활 전체를 반성하고 결단하여 재정비하는 완전한 내적 쇄신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타락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힘으로 좀 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극기는 전통적으로 기도, 단식, 자선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대개 단식보다는 충실한 기도와, 자선활동과 연결된 극기를 강조하는 것이 적당하며, 또 필요할지 모른다. 단식과 금육재가 사순절 때에 장려되지만 특별규정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 단식재를 지키고, 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킨다.

단식재를 지키는 날은 금육재를 겸한다. 금육재 날은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단식재 날에는 한 끼는 정식으로 하되 두 끼의 식사 때에는 적게 먹는다. 단식재는 만 18세에서 60세까지 지킬 의무가 있고,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 까지 지켜야 한다.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신자들은 이 특별규정에서 면제되거나 관면을 청할 수 있다.

단식재와 금육재가 극기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환자, 가난한 자, 비천한 자, 죄수, 실망한 사람, 영세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활로 증거해야 한다. 잘 먹던 사람이 단식함으로써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희사는 분명한 사랑의 행위이다.

30-2. 세례성사 예식

세례는 지망자를 성세수(聖洗水)에 세 번 침수하거나, 아니면 그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면서 집행할 수 있다. 위급한 경우 사도신경을(이것도 급하면 생략할 수도 있다) 바치고 세례경을 외우면서 세례 받을 사람 위에 물을 부으면 충분하다. 물을 사용하면서 주례자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한다. 위급할 때에 세례받은 어린이는 병이 완쾌되면 보례(보충 예식)를 받아야 한다.

각 세례 지망자는 여자의 경우는 대모(代母: 영적 어머니)를 남자의 경우는 대부(代父: 영적 아버지)를 정해야 한다. 대부모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영세자를 영성적으로 보살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으로 어느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세례 때에 지어준다. 물과 세례경은 영세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면서 영위하도록 불린 삼위일체의 새 생명임을 상징한다.

30-3. 세례의 집전자

주교, 사제, 부제는 세례의 통상 집행자이다. 누구든지,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교회의 정신에 따라 신중한 의도를 갖고 세례예식을 이행하면 세례성사를 유효하게 집행할 수 있다. 정상적으로 세례를 베풀 수 없는 위급한 경우 모든 가톨릭 신자는 세례성사를 주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이렇게 세례를 베푼 경우에는 즉시 이 사실을 가까운 본당 신부에게 알려야 한다.

30-4. 세례의 주요효과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함께 묻히는 것이다.”(어린이세례예식서 6) 성세수는 우리의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새 생명의 길에 올려놓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세례는 원죄를 사하며, 유아기가 지나서 영세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지은 개인적인 죄도 모두 사해진다.

세례 때에는 하느님의 특사(特赦)로써 죄의 용서를 받는다. 원죄가 사해져도 원죄의 결과와 죄악에로의 경향은 남아 있다. 죄에로의 경향이 남아 있어 우리는 그것과 투쟁해야 하나, 이 경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 경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노력하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 이 투쟁, 즉 우리 욕망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은 예수님의 죽음에 평생을 두고 참여하는 것이다.

영세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만 그분과 함께 죽는다. 세례는 우리를 교회의 성원이 되게 한다. 교회의 성원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포도나무에 접목되어(요한 15,4-6) 그리스도의 몸에 깊이 결합되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과 함께 물로 씻는 세례는 사람들을 하느님 본성에 참여케 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어린이 세례예식서 5)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이며 동시에 새로운 출생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자녀는 부모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어떤 양식이든 간에 하느님의 본성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 일서의 대부분은 세례와 세례의 효과와 뜻에 관한 묵상이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사람을 정신과 진리에 있어 하느님의 사제가 되게 하는 세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1베드 2,9-10).

30-5. 어린이 세례(유아세례 幼兒洗禮)

“이해도 못하고 개인적 투신도 못하는 어린이에게 왜 세례를 주는가? 부모가 어린이의 종교를 결정하여 선택의 자유를 없애거나 감소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지각없는 것이 아닌가?” 교회법은 가톨릭 신자는 자녀가 출생 한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받게 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교의 거의 시초부터 전 가족이 세례 받을 때에 어린이 세례도 실시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이 세례의 신학적 이유를 제공하였다.

30-6. 세례의 종류와 구원 문제

교회는 복음 말씀을 따라(요한 3,5) 세례 받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리스도나 세례에 관하여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구원될 수 없음을 뜻하는가?

세례에는 물의 세례(수세 水洗)만이 아니라, ‘피의 세례’(혈세 血洗)와 ‘열망의 세례’(화세 火洗)도 있다. 피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받는다. 열망의 세례 범위는 넓다. 세례받기를 분명하게 원하였으나 그 바람이 이행되기 전에 죽은 사람은 열망의 세례를 꼭 받는다. 명확하게 혹은 묵시적으로 세례를 열망하였으나, 어떤 사정으로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분명히 열망의 세례를 받는다. 자신의 과오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들도 선한 생활을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만인에게 충분히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교회헌장 16)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칠 수 있다. 그들은 묵시적이지만 세례를 원하므로, 그것을 열망의 세례라 한다.

30-7. 세례와 성령의 인호(印號)

세례성사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와 마찬가지로 영구적 인호 혹은 표징을 박아준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다른 성사는 한 번 이상 받을 수 있으나 세례, 견진, 성품성사는 한 번밖에 받지 못함을 뜻한다. 이 성사를 받은 사람이 대죄를 범해도, 이 성사의 결과는 존속되고 영구히 남아 있음을 뜻한다.

성 바오로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우리에게 도장이 찍혔다고 한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사제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충분히 참여하고, 그분의 제사를 어디서나 재현하도록 서품을 받았듯이 모든 신자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기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의무가 지워지며, 그리스도의 제사와 일치하여 자신들의 생활 전체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실패해도 그들은 세례를 다시 받지 않고, 고해성사로써 교회와 화해한다. 세례 인호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인의 영구적 소명의 표징이고, 또한 하느님의 자발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다.

31. 견진성사(堅振聖事)
Q 견진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A 우리는 견진성사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다.

Q 견진성사 때 주교가 견진자의 이마에 바르는 기름(크리스마라고도 불림)은 무엇을 뜻하는가?
A 구약시대에 예언자, 왕, 사제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 전통에 따라, 성령의 상징인 기름을 받는 견진자는 이제 하느님의 예언자, 왕, 사제가 되어 세상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드러내고 전하는 자가됨을 뜻한다.

31-1. 견진성사의 기원

성체, 세례, 고해성사에 관한 뚜렷한 가르침은 복음에 있으나 견진성사에 관한 가르침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견진성사에 관한 말, 즉 기름 바르는 예식에 관한 말이 나온 때는 그리스도는 이미 승천하신 후였다.

31-2. 견진성사 기름(크리스마)의 뜻

원래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올리브기름은 대개 고대세계에서처럼 팔레스티나에서도 값진 물품이었다. 용도가 다양한 만큼 의미도 풍부하였다. 아론은 도유(塗油)를 받아 대사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그랬다(레위 8,12.30).
후에 사무엘은 사울을 도유하여 왕으로 세웠고, 다윗에게도 그랬다(1사무 10,1; 16,13).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도유 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비범한 결과를 내었다. 즉 사울은 예언하게 되고, 주의 성령은 다윗에게 급히 다가갔다. 이렇게 해서 기름은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보내진 은총의 참여이며, 성령의 오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31-3. 성령의 성사로서의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안수와 크리스마 성유(聖油)를 바름으로써 성령강림 일에 받은 성령의 은총을 전교회와 모든 회원들에게 전달하는 성사이다. 견진은 전 세계로 향하고, 교회 안에서 영구히 재현되는 성령강림이다. 견진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부르심이다.

31-4. 견진성사 집전자

견진성사로써 완전히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까닭에, 한 지방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푸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에 의해 교회가 위임하면 어느 사제든지 견진성사를 집행할 권한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통상적으로 주교만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에 안수(按手)를 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었다. 이렇게 주교의 집전을 통해서 성령을 받을 때에는 견진자를 교회와 또한 사람 속에서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결합시키는 깊은 유대가 드러난다.”(견진성사예식서 7)

31-5. 세례와 견진

교회 초기에는 세례 직후에 견진성사가 집행되었다. 세례는 재생이고 새로운 창조이지만, 성령으로써 완성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지도, 격려, 용기, 성장을 더 필요로 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신자들은 세례성사로써 재생하고, 견진성사로써 강화되며, 성체 안의 영생의 음식으로써 유지된다.”고 가르쳤다.

어른이 세례를 받는 경우, 세례 집전 사제가 즉시 견진을 베푸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교회의에서 사목적 이유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풀도록 규정한 까닭에 어른 세례자라 할지라도 다시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교육을 받은 후에 주교로부터 견진을 받는다.

라틴 예식에 속하는 견진성사 예식서는 어린이들에 관해서 “견진성사의 집행이 보통으로 만 7세까지 지연되지만, 사목적인 이유에서 좀 더 성숙한 연령에까지 지연되는 것을 허락한다.”(견진성사예식서 11)고 하였다. 많은 곳에서는 사춘기 초기까지 견진성사를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어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면(에페 4,13), 견진성사가 사춘기에나 더 늦게 집행되어도 아직도 입교의 성사로 보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

31-6. 성장의 성사

견진성사는 성장을 의미하며, 견진자가 성장하도록 요구하는 계속적 도전이다. 이 성장을 위해서도 생명이 요구되며, 견진자는 은총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견진은 순간적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또 즉각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다. 견진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주어지고, 영구적 결과를 내는 성사 중의 하나로서 영구적 인호를 준다.

31-7. 견진성사의 효과

견진성사는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 안에 성령강림을 영구화하는 성사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성령이 계신 성전”(1코린 6,19)이 된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성장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하셨다. 견진으로써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여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교회헌장 11) 현세에서의 사도적 임무를 위한 평신도의 소명과,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평신도의 역할이 견진성사와 관련된다.

31-8. 견진성사 효과의 근원

견진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인 파스카 신비에서 효력을 받는다. “보통으로 미사 중에 견진성사가 집행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견진성사예식서 13) 견진성사가 미사와 떨어져서 집행되어도, 그것의 원천은 역시 파스카 신비이다. 크리스마 성유(성 목요일에 주교가 축성한,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기름)도 견진자가 이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이 받은 도유를 상기시킨다(마르 1,11).

32. 성체성사(聖體聖事)
Q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
A 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32-1. 교회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인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고 인도된다.”(직무 5)

32-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 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탈출기 12장).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2-3. 예수의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를 세우심

Q 예수께서는 언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
A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라고 말씀하시었고, 끝으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제사로서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은 희생 제물이 되신다.

32-4. 초대교회의 성찬례 (미사)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성찬례는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그들은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사도 2,42)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32-5. 미사 (성찬례)

Q 미사(성찬례)란 무엇인가?
A 미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 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미사는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 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 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님의 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백색: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탄시기에 사용
홍색: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녹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연중시기에 사용
자색: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장미색: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

32-6.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32-7. 교무금과 주일 미사예물 (헌금)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32-8. 미사의 집전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32-9. 영성체(領聖體)

Q 성체와 성혈은 무엇인가?
A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성체성사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의 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32-10.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코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 없다. 또한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32-11.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코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35.55)

32-12.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32-13.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32-14.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33. 성품성사(聖品聖事)
Q 성품성사란 무엇인가?
A 성품성사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교회 안에 주교, 신부, 부제를 세우는 성사로서, 이 성사를 통하여 이들 성직자들에게 필요한 은혜가 베풀어진다.

Q 그리스도는 왜 성품성사를 세우셨는가?
A 그리스도는 성직자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미사)를 바치며, 하느님의 백성을 지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구속사업이 계속되도록 성품성사를 세우셨다.

33-1. 성품성사의 기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최초의 성목요일에 “나를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고 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성품을 주셨다. 성품성사는 그리스도의 의도와 최초의 성목요일에 하신 예수님의 분명한 행동과 말씀에 그 기원을 둔다.

성품성사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파스카 성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바치셨다. 그런데 성체는 그 제사를 계속적으로 재현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이 사업에 인간이 특별히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사제직은 볼 수 있고 외적인 사제직이다. 우리 구세주 주님이 이것을 제정하셨고, 당신 몸과 피를 축성하여 봉헌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에게 주셨다고 성서가 보여 주며, 가톨릭교회의 전통도 항상 가르쳐 왔다.

33-2. 사제직(司祭職)

사제로 서품되는 사람은 세상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이 된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하므로 사제직은 그의 실존의 영구적 부분이 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물릴 수 없는 선물이다.

성품성사를 받을 때에 사제는 “새로이 하느님께 축성되었고” 그들은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산 연장이 되어, 천상 효력으로써 온 인류사회를 재건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업을, 세기를 통하여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제직은 도유됨으로써 특별한 영적 인호가 새겨지고, 이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 행동할 수 있도록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제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사시고 행동하신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영속시키는 유일한 힘을 형성할 때에 표현된다(교회헌장 10). 사도들의 본질적 활동은 복음의 선포, 공동체의 구성과 지도, 죄의 용서, 병자의 도유, 성체성사의 거행, 인류를 구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연장 등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사제직에 서품된 사람들은, 성화하고 가르치고 다스린다. 사제의 모든 존재와 활동의 원천은 그리스도이시다.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제생활과 활동을 현세에서 계속 실현한다.

33-3. 항구한 사제직

사제직의 축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 사제로 서품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사제이다. 한 사제가 어떤 이유로든 직무 행사에서 면제되거나 해임되어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에의 이러한 특별 참여관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제직의 영구성은 사제가 성품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양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성품성사는 ‘종말론적 표징’,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사제가 자신을 자유로이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사제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활동할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최상 권한에서 나오는 필요한 권한을 받는다.

33-4.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신적 생명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보편사제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품성사는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명에 독특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한다. 성품은 서품받은 이를 그리스도의 진정하고 권위 있는 특별한 대리자로 만든다. 최후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상의 사제직을 별개의 성사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서품 받은 이의 사제직은 신자의 보편사제직과 다르며 구분된다.

33-5. 교회의 직무

신약성서에 여러 가지 직무가 나오지만 정확하게 그 기능과 직명이 전부 규정되지는 않았다. 티모테오서, 티토서와 베드로 1서가 저술된 때에는 어떤 직분의 기능은 좀 더 분명히 구분된다. 여기서 오늘날 성품성사의 핵심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주교의 안수는 한 사람을 사제로 날인한다는 핵심이 신약성경에 나온다.

오늘날 교회에는 성품성사가 세 가지 교계적 계층 혹은 품으로 나타나는데 주교품, 신품, 부제품이다. 이러한 직분은 초기교회에서도 구분되고, 교회의 초대교부들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주교(지도자), 사제(원로)와 부제에 대한 언급(필리 1,1)이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의 지도자를 선정하시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하고 성화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신약성서는 확실히 말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동반자며 교회의 기초로서 그들이 갖는 역할 이행을 위한 특정한 은혜와 의무를 받았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일을 계승하기 위하여 선정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친히 확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조자와 후계자를 선정하였으며, 이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안수하였다.

(1) 주교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의향대로 주교들은 사도들이 처음에 하던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도직 계승은 실제로 주교들에게 이루어졌다. 주교들의 사명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교는 서품되어 지방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일치의 원천이 된다. 그 일치는 특히 주교들이 사제와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성체의 제사를 드릴 때에 나타난다. 주교는 다른 주교한테서만 서품되며(교회헌장 21), 교회의 거룩한 오랜 숭엄한 전통은 주교만이 성품과 부제품을 주도록 제한한다. 주교는 견진성사의 통상 집행자이기도 하며, 지방교회의 공동체에서 일치의 원천이며 표징으로서, 예배에 있어 지도자이고, 공식적이고 전통적 전례자이며, 교구의 으뜸가는 교사이다.

(2) 사제(신부)
사제는 주교들과 더불어 성품성사에 참여한다. 사제는 주교를 도와 교구의 일정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사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고해성사로써 죄를 사한다. 사제의 다른 기능은 설교, 교회를 위한 기도, 병자의 도유 외에 다른 성사를 집행하여 세례로써 사람들 안에 시작된 신적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비록 대사제직의 결정인 주교품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권한 행사에 있어서 주교에게 매여 있지만 사제로서의 영예만은 주교와 함께 지니고 있다(교회헌장 28). 통칭 신부(神父)라고 불리는 이들은 재속사제(교구에 소속된 사제)와 수도사제(수도회에 소속된 사제)로 나뉜다.

(3) 부제
주교직이나 사제직과 마찬가지로 부제직도 성품성사의 일부이며 하느님이 제정하신 것이어서, 교회 안에 영구적 자리를 차지한다(필리 1,1).
부제라는 직명은 ‘봉사’라고 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으로 사도행전 6,1-4에서 보듯이 봉사하기 위한 직책이다. 부제는 교회에 봉사하며 이미 사도시대에 부제직의 임무가 크다고 인정되었다. 부제는 전례행사를 돕는다. 즉 부제는 성체를 분배하고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한다. 부제는 신앙의 증인이며 옹호자이다.
초대교회에서 부제직은 공동체 안에 중요성을 갖는 영구직이었다. 그러다가 서방교회에서는 부제직은 잠시 동안만 행사되는 품이 되었으며, 곧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채우는 직책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구 부제직을 복구시켰다. 유럽과 미국,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서 종신 부제직을 받아들였는데, 이들 종신 부제들은 사회 안에서 일반 직장을 가지고 혼인도 하면서 교회의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교들의 협의에 달려 있다.

33-6. 여성 사제직

교회 내에서 여성의 봉사는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풍족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교회에서 사제나 주교로 서품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초대교회는 당대의 사회적 압력에 대항하여,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앞에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고 강력하게 선포하였으면서도 여성을 사제직에 부르지는 않았다.

물론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도 성품성사에 대한 권리는 갖지 않는다. 성품성사가 영성적 성장이나 개인적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성사는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어 신앙 공동체의 선익을 위하여 좋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만 부여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성에 대해 사제직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단지 교회의 관습에 의한 것이다.

33-7. 사제적 소명의 표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사제직에 들어간다. 한 청년이 건강하고 상당한 지능과 사제직에 요구되는 성격을 가졌고, 또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제적 활동을 하려는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소의 ‘표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명의 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는 교회에 있으며, 그 선정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품할 책임도 교회에 있다. 선택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요한 15,16).

성품성사는 교회 내의 한 특정 지위를 정해 주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다. 그것은 성사이며,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권한을 준 것뿐 아니라 그런 권한을 거룩하게 행사하게 하는 은총도 주는 성사이다. 성품성사는 직무에 대한 특별 은총을 준다.

33-8. 사제의 독신제

교회의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일편단심으로 생명과 마음을 바치기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가 있었다. 독신생활은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욱 비슷하게 한다. 바오로 사도는 독신생활이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데에 많은 자유를 주고, 그분께만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하였다(1코린 7,32-35).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설교하는 사제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크나큰 개인적 희생을 하며 일생을 살도록 교회는 원하고 있다. 사제의 독신생활은 종말론적 표지, 영생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사제생활을 강요받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독신생활 규정은 결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독신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사제직에 응답한다. 독신생활 규정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완화할 권한이 교회에 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사제들이 생활화하는 이 특은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매우 좋다는 것을 보여 준다.

33-9. 사제의 권위 : 봉사를 위한 권위

사제의 권위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선익과 일치를 지향하는 교회의 목적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행사하여야 한다. 첫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가 하느님의 말씀을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신자들에게 권위 있게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두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사명과 관련된다(요한 17,11). 결국 사제가 갖는 권위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권위이며 사제 자신을 위한 권위가 아닌 것이다.

33-10. 사제와 사회정의 문제

사제 본연의 사명은 정치, 경제나 사회적 질서의 사명이 아니라 종교적 질서의 사명이다(사목헌장 42). 그러나 사제는 자기 직무를 이행하면서 특히 인간의 불의와 억압의 문제가 아주 심한 지방에서, 좀 더 의로운 사회질서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사제가 사회, 정치적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한다거나 거기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고 실현하여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제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할 것이다.

사제는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정의가 필요하며, 이러한 정의를 해치는 불의를 고발하고 제거할 임무를 사제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제가 직접 정치, 경제 문제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도 제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제는 자신의 신분에서 이탈하지 않고도 사회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정의에 투신하는 경우에도 사제는 항상 교회적 일치를 유지하며, 복음과 부합하지 않는 말이나 폭력을 배척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며, 새로운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34. 고해성사(告解聖事)
Q 고해성사란 무엇인가?
A 고해성사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Q 고해성사의 효과는 무엇인가?
A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벌을 면제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한 자기 이웃과도 화해한다.

34-1. 고해성사의 제정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렇게 해서 고해성사가 제정되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도와 그들의 후계자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안에 고해성사를 제정하셨다. 영세 이후 죄에 떨어지는 신자는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

34-2. 고해성사의 형식

트리엔트 공의회는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사죄권을 지적하면서, 재판 형식의 고해성사를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사제는 ‘판사처럼’ 행동하면서 죄를 사한다고 트리엔트 공의회와 현대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죄권을 주시고, 사도들에게도 지상에서 푸는 권한을 주셨을 때에(마태 18,18), 인간의 사법심리 절차를 하느님의 정의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사도들로 하여금 그 이후에도 사죄권을 갖게 하셨다(마태 19,28).

범인인 죄인은 자신을 고소하고, 주님의 대리자 앞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며 주님께 다가간다. 고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고백을 듣는 사제는 고해자의 마음 개방, 통회,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에 따라 죄를 용서해준다. 사제가 고해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이다. 그래서 사제에게 한 말은 절대 비밀의 의무로 보호받는다. 그 표지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34-3. 고해성사를 위한 세 가지 요구조건

죄는 하느님과 맺은 우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맺고 있는 친교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러한 죄로 인한 파괴, 분열을 복구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그리고 내 이웃과 다시 화해시키는 성사이다. 그러기에 고해성사를 ‘화해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자면 성사의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참회, 고백, 보속이다.

(1) 참회(또는 통회 痛悔)
제일 중요한 것은 참회이다. 하느님을 침해하였음에 대한 진정한 아픔이 따라야 한다. 참회는 사랑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고, 죄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고, 또한 하느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통회이어야 한다. 통회는 신앙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며, 인간 행동의 어떤 나쁜 결과에 대한 후회에 기초한 단순한 인간적 후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외에 아무것도 더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우정을 끊는 모든 대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2) 고백
하느님의 법에 의하면 조심스러운 양심성찰을 해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대죄뿐 아니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도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영세 이전에 범한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한 번 고백하여 사죄를 받은 대죄를 다시 고백할 필요는 없다.

(3) 보속
교회는 죄에 대한 ‘현세적 벌’이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고해자가 자기 죄에 대하여 보상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사제가 요청하는 ‘보속’을 함으로써 자기 죄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하여서 고해행위를 완수해야 한다. 보속이란 사제가 고해자에게 주는 실천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자신의 죄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나 물질적인 손해를 진정으로 기워 갚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보속행위는 실제로 죄에 대한 치료약이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약으로써 생활개선을 위한 도움이 된다.

34-4. 완전한 참회(상등통회 上等痛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 참회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 위에 사랑하기로 한 하느님을 아프게 하였기 때문에 슬퍼하는 참회라야 ‘완전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참회가 신앙의 다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즉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처벌이 무서워서만 통회한다면 그 참회는 ‘불완전한’ 것(하등통회 下等痛悔)이 된다.

중죄에 떨어졌던 사람이라도 완전한 참회를 하면 즉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다시 맺게 된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에서가 아니면 대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신앙의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했던 사람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을 중대한 의무를 가진다.

34-5. 고해성사의 대상이 되는 죄

모든 죄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므로 큰 죄(대죄), 작은 죄(소죄)로 나누어 어떤 죄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고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는 전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 주관적으로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무겁게 느껴지는 죄 또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사소한 죄에 대해서까지 병적으로 고해성사를 볼 필요는 없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화해이지, 하느님의 벌을 피하는데 있지 않으며, 하느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려고 기다리는 판사가 아니시라 우리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루카 15,11-32)에서처럼 착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또 미사 때 우리는 참회예절을 하는데, 이로써 우리의 사소한 죄는 전부 사해진다.

34-6. 대사 (大赦)

약점을 가진 우리를 돕기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사는 이미 용서받은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전부나(전대사 全大赦) 부분의(한대사 限大赦) 면제를 말한다. 대사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한의 힘으로 죄의 용서를 이미 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 일부를 나누어주며,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양을 제거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교회가 대사에 부과하는 선행을 해야 한다.

34-7. 고해성사의 효과

고해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죄인은 치료의 은총을 받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잃었던 아들과 같이 성부의 환영을 받는다(루카 15,20-24). 동시에 죄인은 공동체 안에 돌아와 공동체의 성찬 식탁(영성체)에 다시 참석한다. 고해성사는 실제로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회복하거나 갱신한다.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잃으면 고해성사로써 회복할 수 있다. 대죄를 범한 신자에게는 고해성사를 받고 죄의 용서를 청할 의무가 있다. 죄의 용서는 가능한 한 속히 청해야 한다. 교회법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죄를 지은 이들은 그때마다 가장 빠른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조심스럽게 자주 받는 것은 소죄의 치료에도 매우 유익하다.

잦은 고해성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열심한 이에게는 고해가 깊은 회개를 하는 방법이고, 성령 안에 키워지는 방법이 된다. 이런 정신으로 교회는 규칙적이고 잦은 고해를 권장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성사를 병적으로 자주 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34-8. 어린이 고해성사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에는 부모와 대부모가 유아를 대신한다. 그러나 지능이 발달하면, 어린이들은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유아세례를 실현하고 재생시킬 수 있다. 어린이 고해성사는 너무 오래 지연되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가 성숙함에 따라 도덕적 양심에 비추어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도 수련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첫영성체 전에 첫 고해를 해야 한다. 고해와 영성체에 적절한 연령은 어린이가 추리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즉 만 9세쯤이다. 그 시기부터 고해와 영성체에 관한 법규를 지킬 의무가 시작된다.

34-9. 고해성사의 공동체성

초대교회에서 어떤 중죄를 범한 죄인은 파문되고, 공개적 보속행위를 해야 하였으며, 성목요일에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의 지체이므로 한 지체의 병은 몸 전체에 고통을 일으킨다. 적어도 개인의 실패는 몸 전체의 성장을 방해하고 활동력을 제한한다(1코린 12,26).

자신만을 직접 해치는 죄악도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할 때 그는 타인을 침해하고, 그 사람과 가족에게 손해를 끼친다. 또한 그는 공동체 전체의 개방성과 상호 신뢰에 금이 가게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생명의 맥박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널리 퍼진 사회 부조리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사람이 어둡고 엄청난 부조리와 관련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양심성찰을 할 때에 자기의 사회적 책임과 죄악의 사회적 결과를 성찰해야 한다.

34-10. 고해성사 예식의 종류

고해성사는 공동예식과 개인적 예식 두 가지 방법으로 집행될 수 있다. 공동예식도 성사의 중요한 개인 요소는 보존되어야 한다. 각 고해자는 자기의 죄를 개별적으로 고해하고 개별 사죄를 받는다. 그리고 개인적 예식도 교회의 모든 전례행위가 그러하듯 공식적 요소를 갖는다. 고해성사는 보통으로 공식적으로 인가한 장소에서 집행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죄를 받을 때까지 성찬 식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영성체 할 수 없다).

공동고해는 고해의 교회적 성격을 더 명백히 드러낸다. 공동고해는 죄의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며, 죄인이 하느님께 돌아오면 공동체와도 화해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동고해의 독서, 성가와 기도는 참석자들을 통회시키면서 하느님의 가족으로 묶어 주고, 각 고해자가 개인적 회개와 새로운 결심을 깊이 하도록 돕는다. 개인고해에도 일정한 이점이 있다. 개인고해는 융통성이 많으며, 성사 집행이나 영성적, 사목적 지도를 병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수한 이유 때문에 개별적으로 죄를 고해할 수 없을 때에는 공동 사죄경으로써 성사적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지방주교가 규정한 중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공동사죄를 줄 수 있다. 공동사죄를 받은 이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동사죄를 재차 받기 전에 개인고해를 해야 한다. 개별적 고해와 개별사죄만이 신자들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정상적인 길이다.

34-11. 고해성사 예식

1. 먼저, 지은 죄를 모두 알아내고
2. 진정으로 뉘우치며
3.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4. “고백기도”와 “통회기도”를 바친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 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 아멘.
● 고백한 지 (몇 일, 몇 주일, 몇 달)됩니다.
알아낸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죄를 고백한 다음
●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제는 고백자에게 훈계하고 보속을 준다.
필요하다면 고백자에게 다음 통회기도를 바치게 할 수 있다.
●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사제는 고백자 머리 위에 두 손이나 오른손을 펴 들고 사죄경을 외운다.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는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 아멘.
┼ 주님을 찬미합시다.
● 주님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 감사합시다.

35. 혼인성사(婚姻聖事)
35-1. 성서에 나타나는 혼인

하느님은 혼인을 예정하시고, 창조의 절정 순간에 그것을 설정하셨다. 창조에 대한 두 가지 설화에는 혼인제도에 관해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창조설화에서는 출산이 강조되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둘째, 설화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우정관계가 먼저 나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충실한 일부일처제가 구약성서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잠언서는 아내를 책임과 위엄을 가진 동업자로 묘사한다(잠언 31,10-31).

35-2. 혼인과 독신

바오로 사도는 혼인의 신성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동정이나 독신생활 또한 권고한다(1코린 7,32-34). 교회는 혼인을 존중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생에 대한 신앙을 뚜렷이 증거하기 위하여 혼인의 축복을 포기하는 생활형태(독신생활)도 또한 존중한다. 이런 생활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동정생활이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는데”(1코린 7,31), 동정생활은 영생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혼인성사로 결합한 사람들은 교회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보이는 표지이다. 독신자들은 혼인을 포기하지만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독신자들은 오히려 혼인이 표지하는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사랑을 특별한 방법으로 증거한다. 그들은 부부애가 거룩한 것이지만 잠정적 사랑이며,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서로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결혼소명과 독신의 소명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사랑의 성덕을 추구할 그리스도인의 기본 소명 안에서 서로 돕는다.

35-3. 혼인의 세 가지 선익(善益)

혼인의 세 가지 선익은 자손, 정절, 성사(聖事)이다. 하느님이 혼인을 세우시고 성화하신 것도 그 선익을 위해서이다.

(1) 정절(부부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혼인을 ‘사랑의 공동체’(사목헌장 47)라고 부른다. 정절은 최소한의 소극적 의미에서 결혼 상대자가 아닌 어느 누구와도 성행위를 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정절은 부부애를 보호하는 보루이다. 부부애로 깊이 맺어진 공동체는 조물주 친히 제정하셨고, 조물주 친히 그 법칙을 주셨으며, 결혼 당사자도 철회치 못할 인격적 동의로 맺은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적 부부애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수한 사랑의 결실과 애덕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온전한 행복을 고려하며, 품위 있게 사랑을 표현하게 한다. 주께서는 이 사랑을 당신의 은총과 특별한 은혜로써 정화시키고 완성하시고 높여 주셨다(사목헌장 49).

상호간에 주고받는 사랑은 당사자 간의 기본적 평등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는 동일하다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르치시면서 부부평등의 기반을 쌓으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2) 자녀 출산
자녀 출산이 혼인의 기본 선익이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확인하였다. 혼인의 목적은 ‘부부사랑’과 ‘자녀의 출산’ 그리고 ‘상부상조’에 있다. 즉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성취함으로써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서로의 역할 안에서 서로를 도와주는데 있는 것이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다.”(사목헌장 50)

(3) 성사
①혼인성사의 집행자
혼인성사의 집행자는 혼인 당사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혼을 금지하시므로 교회는 혼인 과정을 조심해서 감독하고자 한다. 보통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와 두 증인 앞에서만 유효하게 혼인할 수 있다. 혼인식을 주례하는 사제는 “신랑 신부의 동의를 묻고 그 답을 받아야 한다.”(전례헌장 77) 그가 주교이거나 본당신부이거나 대리자이더라도 그 부부가 혼인할 자유가 있고, 혼인성사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알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 혼인의 목적과 의미를 알면서 진정한 혼인계약을 맺으려는 것인지 보살필 의무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혼인성사를 받기 전 일정한 교육(혼인교리)을 받도록 하고 있다.

②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혼인은 불가해소적 사랑의 계약이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원한 사랑을 상기시키는 거룩한 표징이다. 그 계약처럼 혼례를 마친 혼인성사의 효력은 절대로 풀리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창세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하느님께서는 ‘이혼’을 인정하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분명하게 ‘이혼’을 엄금(마태 19,4-6; 루카 16,18)하시면서 그것이 창조주의 본래의 뜻이라고 명시하셨다(마태 24,35). 사도 바오로 역시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코린 7,10-11. 39; 로마 7,2-3).
어떤 경우에 하느님은 사회관습법에 의한 혼인을 해소하는 것을, 다시 말하면 영세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맺은 혼인의 해소를 허락하신다. 비신자 부부 중에 하나가 신자가 된 경우에, 비신자가 신자와 평화롭게 살기를 거부하면 교회는 그 신자의 재혼을 허락한다.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1코린 7,12-16)을 그렇게 이해하여 왔다. 이 권리를 ‘바오로 특전’이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간의 혼인성사이었고, 참된 혼인합의와 혼인성사를 받았으면, 한 배우자의 죽음으로가 아니고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교회는 굳게 선언하고 가르친다.

35-4. 혼인의 특수문제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또 신자들도 교회 밖에서 재혼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이혼과 재혼을 허락할 수는 없다. 혼인 계약의 지속적 힘을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남편, 아내, 자녀의 선익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교회는 부부가 공동생활을 피하여 별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부부가 계속 동거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

(1) 혼인의 무효선언
겉으로는 혼인계약에 하자가 없어 보이나 실제로 결함이 있을 수 있다. 즉 결혼 당사자 중에 한편이나 양편이 자유로운 동의를 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다면, 진실한 혼인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초부터 진정한 혼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에 대한 공식인정을 교회 법원에서 받을 수 있다. 그 인정을 취소 혹은 더 정확하게는 무효선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혼인이 유효하지 않았다고 결정되면 다른 사람과의 재혼이 가능해진다.

(2) 혼인조당(婚姻阻當)
혼인신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회는 혼인조당을 선언할 권리와 조당을 설정할 권리를 갖는다. 조당이란 신법이나, 교회법 때문에 혼인을 무효화하거나 불법화하는 사정을 말한다. 혼인을 무효화하는 조당, 즉 혼인을 처음부터 참된 혼인이 안 되게 하는 조당을 ‘절대조당’이라 한다. 이 중에는 적당한 연령 미달, 성기능 장애, 이미 혼인성사를 받은 자, 성품 수령, 한쪽 당사자의 장엄 정결서원, 너무 가까운 촌수, 어떤 범죄 등을 포함한다. 가톨릭 신자와 비 영세자간의 관면 없는 혼인도 무효이다. 혼인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정한 다른 조당을 ‘방해조당’이라고 부른다. 가톨릭교회 신자가 세례 받은 개신교 신자와 혼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조당이다. 이런 조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된 혼인은 유효하기는 하지만,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교회는 이러한 혼인을 금지한다. 교회 안에서 혼인하려면 혼인 집행 전에 교회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다.

(3) 문제의 해결
고의로 무효혼인을 한 신자는, 하느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현재의 배우자와 혼인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되도록 빨리 은총 지위에 돌아올 의무가 있고, 돌아올 때까지 영성체를 할 수 없다. 어떤 복잡한 경우에라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는 노력한다. 본당 신부와 교구 혼인재판소는 무효혼인을 한 사람들을 돕도록 힘쓸 것이다.

35-5.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 부부애의 모형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애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었고, 필요할 때에는 고통도 감수하였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부부가 죽을 때까지 서로 성실히 사랑하자면, 서로 용서하고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혼인 집전은 “보통으로 미사 중에 있어야 한다.”(혼인예식서 6) 이것 역시 혼인성사가 파스카 신비에서 나옴을 의미한다. 혼인미사 중에 말씀 전례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혼인의 중요성과 부부와 자녀들의 성화에 힘써야 할 혼인의 직책과 임무”를 설명한다.

36. 병자성사(病者聖事)
Q 우리는 병자성사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A 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파스카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참여하며, 그분의 위로와 용기를 받으며, 필요한 경우 육신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얻게 된다.

36-1. 병자성사의 기원

우리 주님은 병자에 대하여 동정심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세례자 요한에게 밝혔다. 환자의 치료는 그리스도의 활동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비유에서 상 받을 사람들에게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6)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반면에 벌 받을 자들에게는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3)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이 복음선포를 돕기 위하여 활동할 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부활 후에도 비슷한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마르코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병자성사의 도유에 관한 첫 암시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마 치유로 이미 존재하던 관습을 인준하시면서, 그 관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루카 4,18-19).

36-2. 병자성사의 대상자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병자성사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만 베푸는 성사가 아니라 병과 노쇠로 위험상태에 있는 이들이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면 벌써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가 죽음의 직전에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병자가 이 성사를 받은 후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다시 병들었을 경우라든가 또는 같은 병세가 계속되다가 중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는 반복해서 받을 수 있다.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마다 병자는 수술 전에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많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에게는 병세의 위험성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도 그들이 이 성사로써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으면 역시 병자성사를 줄 수 있다(약 7∼8세 이상).

사제가 병자한테로 불려갔을 때 병자가 이미 죽었을 경우, 사제는 그를 위해서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병자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조건부로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36-3. 예식

병자성사를 베푸는 이는 주교, 본당신부, 병원 원목과 이들의 위임을 받은 사제들이다. 이 예식은 인사, 시작예절, 참회식으로 시작한다. 말씀 전례가 그 다음에 온다. 친구와 친척이 기도와 노래에서와 같이 독서에도 참가하여 공동체적 분위기를 만들면 더 좋다. 먼저 참석한 사제 모두가 안수한다. 그리고 성사 집행자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혹은 급한 경우에는 이마나 몸의 아무 부분에 기름을 바른다. 성유를 바르는 행위가 안수이기도 하다. 특히 이 기름 바르는 예식과 그것에 따르는 기도가 성사적 표지이다. 병자의 도유 예식은 환자를 위한 특별기도로 끝을 맺고 주님의 기도, 혹은 영성체와 강복이 뒤따른다. 기름 바르는 예식을 미사 중에도 할 수 있다.

36-4. 효과

“이 성사는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의 도유는 아직도 속죄해야 할 어떤 죄과가 있다면 그 죄과와 죄의 결과를 씻어 주어, 병자의 영혼을 거뜬하게 해 주며, 견고케 해 주고,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로 하여금 그 도움을 받아 병고와 고생스러움을 더 쉽게 참으며 마귀의 유혹에 더 잘 대항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병자성사 예식서 119)

대죄가 있는 줄을 알면서도 병자성사를 받으면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대죄가 있다면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 중에 있는 병자가 의식을 잃었으나, 신앙과 희망의 행위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으로 준비하여서 성사의 은총을 받기에 적절한 상태에 있을 때 병자성사는 대죄라도 사한다. 병자성사는 그것을 받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인도하는 내적 고해 즉 참회를 하게 한다. 고통이 치유의 방법이 되려면, 우리의 고통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켜야 한다. 성 야고보가 지적하였듯이 그것이 병자성사의 독특한 은총이다.

36-5. 고통과 파스카 신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병으로 인한 고통이 어떻게 파스카 신비와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교회 전체는 “병자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한다.”(사목헌장 11)고 한다.

병자의 도유가 육체의 병을 고치든 고치지 못하든 정신을 위한 치료가 되어, 곤경 중에서도 매사가 희망적이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36-6. 노자성체 (路資聖體)

인간은 탄생하여 이 세상에서 살다가 노쇠하여 죽어간다. 죽어가는 환자가 하는 영성체를 노자성체라고 한다. ‘여행을 위한 음식’이고 마지막 여행을 위해서 받는 영성적 음식이다. 그것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이다.

37. 그리스도인의 죽음
37-1.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죽음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이다. 우리 생명은 시간으로 측정하고 시간 안에 우리는 변한다. 늙어서 죽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죽음은 죄의 벌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영혼은 육체에게 생명을 주도록 창조된 인간의 생명 원리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이 생명의 원리는 계속 생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육체가 분해된 후에라도 계속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직접 뵈옵고, 하느님의 생활에 참여한다. 하지만 ‘육체를 떠나 있는 것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는 육신의 부활을 기다린다.

구약에서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였지만(창세 2,16-17), 초기에는 인간이 지상생활이 끝난 후에 개인 생명이 계속된다는 인식이 분명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으로써 종교활동이 끝난다고 생각하였다.

묵시문학(다니 12,1-14)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싹 텄고, 지혜문학은 인간의 불멸에 관한 좀더 밝은 전망을 제시하였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1-4)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음에 관한 사색보다 모든 백성의 생활을 완성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초기에는 개인의 죽음에 관한 집념이 크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은 자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죽음의 신비에 관하여 진지하게 숙고하게 하였다.

37-2. 사심판 (私審判)

Q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A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

Q 심판은 몇 가지 있는가?
A 사심판과 공심판(公審判), 두 가지가 있다.

Q 사심판이란 무엇인가?
A 사람이 죽을 때 육신을 떠난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각자 받는 심판을 말한다.

사람은 죽은 후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 교회는 은총 중에 죽어, 더 이상 정화가 필요 없는 사람은 죽자마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은총상태에서 죽었으나 정화가 필요한 이는 그 정화가 끝난 후에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대죄 중에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끝없는 벌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37-3. 연옥 (煉獄)

Q 연옥이란 어떤 곳인가?
A 연옥이란 세상에서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이 하느님을 뵙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전까지 단련 받는 곳이다.

어떤 이는 은총 중에 하느님과 우정을 맺은 상태에서 죽었으나 소죄나 불완전을 가지고 있거나,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않은 수가 있다. 이러한 영혼들은 하느님을 뵈러 가는 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지상에 남아 있는 신자들은 미사, 기도, 자선과 교회의 관습대로 신자들이 다른 신자에게 하는 여러 선업으로써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그 기간이 단축되도록 중재할 수 있다.

37-4. 림보 (limbus)

13세기부터 특수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나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서 ‘림보’란 말을 사용했다.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에게는 자기 죄가 없다. 그러나 세례성사로써 구원 은총을 받지 못하였고, 다른 방법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자유로운 응답을 한 것도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따르는 대부분의 신학자는, 그 유아들이 은총 없이 죽어서 하느님을 뵐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자연적 행복을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림보의 존재나 성격에 대하여 교회가 공식선언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37-5. 지옥

교회는 슬프고 한탄스러운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세기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경고하였다. 지옥과 악의 신비 사이와 지옥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

지옥에 대한 참된 이해가 구세사의 초기단계에는 없었다. ‘셔올’(Sheol 저승 또는 지옥)은 선인과 악인이 죽은 후에 어둡고 불만스러운 실존 형태를 함께 견디면서 사는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셔올은 악인이 벌 받는 장소일 것이란 계시가 서서히 주어졌다. 그 계시로 말미암아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더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37-6.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 신자는 죽음을 예수님께 다가감이요, 생명에로 돌아감이라고 본다. 은총 중에 죽는 이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있고, 삼위일체에 대한 지복직관을 갖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신앙과 사랑 안에 죽는 이는 생명에로 들어간다(교회헌장 48). 그들은 그리스도, 그의 모친, 성인들과 우정을 맺고 영광을 누리면서 하느님을 본 모상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교회헌장 49).

37-7. 성인의 통공 (通功)

교회는 지상에서 신앙 안에 사는 이들의 가족일 뿐 아니라 성인들의 집단이다. 여기서 성인이란 교회의 공식 선언에 의해 공경을 받는 신앙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든 이들을 말하며,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도 그분들과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면서 언제나 결합되어 있고, 그들의 새 생활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께 다가간다(교회헌장 49).

하지만 축복받은 그들의 행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 부활, 즉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인간의 한 부분인 육체가 영원한 삶의 기쁨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뵙는 행복과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을 누릴 뿐 아니라, 그들은 아직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형제와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교회 건설에 이바지한다(교회헌장 49).

38. 하느님의 나라가 오심
영원한 삶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사랑과는 관련 없는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다.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든 것의 절정이고, 의미를 주며 완성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는 인간의 활동은 중요하고 존엄한 것이다. 재능과 정성을 들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고 이 세상을 재건하려는 인간 노력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에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39)

38-1. 세상의 변화 : 종말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함은 세상이 완전히 전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라져 가며(1코린 7,31),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하느님 곁에 머무를 이들이 받을 최종 영광에 부적당한 것은 모두 소멸되고, 소중하고 좋은 것은 모두 만발할 것이다.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바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는 누구나 주님과 함께 내세에 있을 즐거운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이어서 “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신 다음,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묵시 21,4-6)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은 현재생활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임무를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망은 현세는 시작에 불과하며 현세의 저변에는 앞으로 올 것이 자란다는 것을 인정함이다. 우리가 내세에 희망을 갖고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완성되기를 원하며, 세상의 열망이 충족되고, 생명이 완성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38-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신뢰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희망을 걸고 기대하여 왔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양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오시나 가톨릭 신앙은 슬픔을 끝내고 사람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을 기다렸다. 그리스도 친히 당신은 주님이요 재판관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태 16,27; 26,64).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영광 속에 오실지 모른다. 재림의 그 시각은 하느님께서만 알고 계시나 그 시각은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다(2베드 3,10). 가톨릭 신앙은, 역사의 종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경,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자의적 해석은 계시를 곡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많은 이들이 묵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예언하였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커다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38-3. 천년왕국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시기 전에 지상의 나라를 천년 동안 성인들과 함께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천년왕국설’은 신앙의 메시지와는 먼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실 다가올 완성에 대한 갈망이다. 재림은 은총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이미 실존하는 나라를 공포하는 것이기도 하다(요한 12,31).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현재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은 완성할 것이다. 재림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최대한으로 빛날 것이다. 그 부활의 힘은 그를 믿는 모든 무리에게 연장되어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이다.

38-4. 육신의 부활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1테살 4,16). 구원된 이들이나 구원을 배척한(요한 5,29) 이들이나 모든 인간은 자기의 육체를 갖고 부활할 것이다.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은 육체를 갖고 하느님의 심판대에 나타나서 자신의 행동에 관한 보고를 드릴 것이라고 교회는 굳게 믿고 늘 가르쳐 왔다.

38-5. 공심판 (公審判)

Q 공심판이란 무엇인가?
A 공심판이란 육신이 부활한 후 예수께서 천사들과 모든 사람 앞에 각 사람의 사심판의 결과를 공포하시는 것을 말한다.

공심판은 각자가 죽은 후에 받은 사심판의 요약이 아닐 것이다. 이 최후심판에서 하느님은 당신 나라의 마지막 단계인 하늘의 공동체를 설립하실 것이다. 그때에 인간은 어떻게 사랑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그는 당신 사랑에 자유로이 응답하도록 누구나 생명에로 초대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큰 계명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모든 사람의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속 사업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에 합당한 양식으로 참여할 것이다. 사람의 최상 심판관이 되실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구속자로서의 당신 사업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주님이란 것이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다.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

38-6.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 양식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 참여함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생활을 장식하기 위해 육체를 가진 피조물에게 광채 가득한 곳을 제공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서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하느님 나라의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실재이며,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가 함께 살며 누리는 기쁨이라고 가르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생명의 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현세에서도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삶은 씨앗이고, 약속에 불과하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 없고, 하느님의 약속이 다 실현될 것이므로 바랄 것이 없고,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을 가지고 사랑할 것이다.

영원한 삶은 인간 상호간에 흐르는 깊은 사랑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위격적인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에 직접 참여하는 인격체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뵙는 은총을 받아서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의 피조물일 것이다.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복직관을 충분히 누릴 것이나, 기쁨의 핵심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하느님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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